서정보 사회부 차장
검찰이 몰라준다고 한 ‘관례’를 정리하면 이렇다. ‘공식 경로로 구할 수 없는 문서를 협조자를 통해 구했다. 이 문서는 재판에 제출될 것이기 때문에 공신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출처를 밝히면 협조자가 노출돼 앞으로 활용할 수 없다. 따라서 외교부에 나가 있는 국정원 출신 영사가 이 문서에 대한 확인서를 써준다.’
간첩을 잡기 위해 불가피한 관례라는 것이다. 그는 영사가 확인서를 ‘확인’ 안 하고 그냥 써줘도 되느냐고 하자 “나쁜 일도, 불법도 아니고 관례처럼 해오던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정원에 따르면 권 과장은 정말 유능한 블랙 요원(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요원)이자 중국통이었다. ‘왕재산’ 간첩 사건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물증을 확보하고 영사확인서를 쓴 뒤 법정증언까지 해 유죄를 받게 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런 그는 수십 년의 노하우 중 하나인 관례를 개인 자격에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정원이란 조직은 관행 뒤에 숨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최근 재심에서 무죄가 나 줄줄이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대의 보상을 해주는 과거 간첩사건을 보면 실제 간첩이 아니었는지를 따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당시 불법 연행과 구금, 폭행 등 수사 절차를 문제 삼고 있다. 당시에는 그것이 간첩을 잡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여겨지는 관행이었을 것이다. ‘간첩이 죄를 순순히 자백할 리가 없으니 고문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리라. 당시 그런 관례의 효과로 유죄가 내려졌지만 30∼40년이 지난 지금에선 부메랑이 돼서 돌아온 셈이다.
이번 사건으로 곤경에 처한 건 국정원만이 아니다. 이 사건을 공소한 검찰 역시 국정원이 주도한 수사에선 국정원에 의존하던 관례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증거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못하고 덥석 받아들여 재판부에 냈다가 위조 논란이 빚어지자 증거를 철회하는 굴욕까지 맛보게 됐다.
최근 김진태 검찰총장은 대검 간부들과의 회의에서 “과거의 관례나 타성에 젖거나 단 한순간 방심하거나 소홀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란 책에 나온 문구를 인용했다. 이 책은 인디언 소년이 본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다.
겨울(위기)이 오면 평소에는 멀쩡해 보이던 가지(관례) 중에 어떤 것이 허약한 가지인지 드러난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관례여서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외부의 충격에 더욱 취약하다. 특히 국가안보와 정보 수집의 최전선에 있는 국정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간첩 수사나 정보 수집의 관례를 재점검해 봐야 한다. 약한 가지는 겨울이 쓸어가기 전에 미리 쳐 내는 것이 가장 좋다.
서정보 사회부 차장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