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논설위원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문제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류 언론이 크게 보도했다. 한인단체는 맥도날드의 행위를 인종차별 노인차별이라고 비판하며 불매운동을 선언했다. 한인단체 성명서가 지적한 대로 이 일이 인종차별이고 노인차별일까.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차별이라고 규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한인이 아닌 백인이, 노인이 아닌 청소년이 새벽 5시부터 와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하루 종일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면 맥도날드 업주가 어떻게 했을까.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인 노인들이 차지한 업소의 자리는 모두 업주의 비용이다.
맥도날드 노인 사건에 공감이 간 것은 우리나라 상황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도심 커피전문점은 아침시간대 노인 차지가 된 지 오래다. 동아일보 바로 옆 한국무역보험공사 건물 1층 커피빈에서는 코트에 중절모까지 갖춰 입은 어르신들이 신문과 아이패드를 들여다보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국은행 주변 스타벅스는 대부분의 고객이 인근 사무실에 추억을 갖고 있는 전직 은행원들이라고 한다. 은퇴한 어르신들이 연어가 회귀하듯 젊은 시절 직장 주변 커피숍에 둥지를 트는 것이다. 업주로선 다행스럽게도 이분들은 직장인이 몰려올 점심시간 이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탑골공원과 가까운 맥도날드 종로3가점이나 스타벅스 인사점도 노인들의 명소다.
미국인이 노인을 공경하는 동양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해 못한다는 건 억지다. 한인들이 노인을 공경했다면 어른들을 새벽부터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하지 않고 안방 공간을 어른들께 내어주어야 했다. 노인을 특정 공간에서 배척하는 일은 우리가 미국보다 덜하지 않다.
작가 박범신은 소설 ‘은교’에서 이적요 시인이 은교와 함께 라이브 카페를 찾았다가 무안당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저 꼰대는 뭐야! 내 귀에 그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홀 안에 암묵적으로 흐르고 있는 강력한 배타성을 느꼈다. 내가 마치 ‘사람들의 나라’에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늙은 당나귀’ 같았다.” 시인은 은교와 결국 노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감자탕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맥도날드 사건은 미국에서 발생해 한인커뮤니티가 부각됐을 뿐이다. 현재 고령화 속도로 보면 한국에서 노인들이 탑골공원 정도가 아니라 공원과 커피숍 전체를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다. 공공장소인 지하철에서 노인과 젊은이가 머리채를 잡고 자리싸움을 하는 세상 아닌가. 고령화시대 노인과 젊은이들이 공사(公私) 공간에서 공존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