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입대 신성민 상병 허망한 죽음
신 상병은 의젓한 동생이자 집안의 가장이었다. 신 상병의 어머니는 딸만 셋을 키우다 아들을 낳고 싶어 매일 기도했다. 서른일곱 살 무렵 늦둥이 신 상병을 낳았다. 하지만 신 상병이 다섯 살 되던 무렵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장애판정을 받으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는 공장에서 잡일을 하거나 전화 상담원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부모 대신 신 상병은 가장 노릇을 했다. 누나들이 집에 늦게 들어올 때면 마중을 나갔다. 막노동, 서빙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벌이도 했다.
지난해 1월 입대한 동생은 강원도 홍천의 부대로 배치받았다. 가족은 처음 신 상병의 군 입대를 말렸다. 186cm에 60kg이 약간 넘었던 동생에게 누이들은 조심스레 “살을 조금만 더 빼 공익근무를 하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신 상병은 오히려 살을 더 찌웠다. 이왕 가는 것 제대로 가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가족은 해병대에 지원하겠다는 것도 간신히 말렸다.
신 상병은 머리가 아픈 채로 부대생활을 계속했다. 혹한기 훈련에도 빠지지 않았다. 신 상병의 뇌에 생긴 암 덩어리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고통을 참다못한 신 상병이 의무대를 다시 찾아가자 중대장은 욕설과 함께 “아직 여기 올 기력은 있네”라며 핀잔을 준 것으로 조사됐다.
밥도 못 먹고 물만 마셔도 토하는 상태에 빠졌다. 신 상병은 결국 1월 초 가족에게 ‘아프다’고 전화로 알렸다. 전화를 받은 가족은 불안에 휩싸였다. 평소 가족이 걱정할까봐 ‘아프다’ 소리 한번 안 하던 성격이었다. 신 상병은 2주가 지나서야 집에 왔다. 부대가 휴가를 미루고 신 상병을 부대 행사에 참여시켰기 때문이다. 뒤늦게 심각성을 파악한 부대 관계자는 신 상병이 휴가 나가기 이틀 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할 거 다 해봤는데 애가 계속 아파한다”고 했다.
1월 25일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와 둘째 누나는 당황했다. 아들은 검은 양말과 흰 양말을 한 짝씩 신을 정도로 정신까지 혼미한 듯했다. 큰 병원에 가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고 “어떻게 집으로 걸어 왔냐”며 놀랐다. 뇌종양의 상태가 심각했다. 가족은 신 상병이 5개월 동안 아파했지만 부대에서 ‘꾀병’으로 여겨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나라를 위해 아들을, 동생을 보낸 가족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첫째 누나는 “부대에선 ‘할 거 다했다’고 했지만 두통약과 소화제를 주고 근처 애들 가는 소아과에 데려가 척수 검사를 했던 게 전부”라며 눈물을 흘렸다.
신 상병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국군수도병원에서 한 수술 외에는 지원이 안 된다고 해 수술비도 가족이 냈다.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가족은 수술 이후 신 상병을 국군수도병원으로 다시 옮길 수밖에 없었다.
17일 빈소에서 기자와 만난 신 상병의 아버지는 큰소리로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생기지 않게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그들을 용서하지 마’라는 아들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귀에 맴돈다”고 했다. 누나 민령 씨는 “자기 부하가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지휘관들이 한 번도 사과하지 않느냐”며 울부짖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이 몸이 아픈 병사를 세밀하게 보살피고, 적절한 진료를 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향후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군 의료체계 개선에 더욱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성남=김성모 기자·윤상호 군사전문기자 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