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Narrative Report]“엄마가 미안해”… 세 여인의 옴니버스 이야기

입력 | 2013-05-04 03:00:00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숲 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 이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나무는 과연 쓰러진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친엄마가 누군지 모르고 내가 태어나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

올해 내 생일을 4월 6일로 정했다. 석사학위 논문을 2일까지 제출해야 하고 4일은 선약이 있어 토요일인 그날이 적당했다. 지난해 스물아홉 번째까지의 생일은 3월 20일이었다. 난 아무도 모르게 그날이 지나가 주길 바랐다. 생일 축하인사를 받을 때마다 내가 나에 대해 아는 정보가 서류상 이름과 생일뿐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 그날 태어났는지 목격했거나 증언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나와 이란성 쌍둥이인 언니도 생일을 새로 정하자는 계획에 동의했다. 나는 한국에서 알게 된 친구들만 불러 새 생일파티를 했다. 그날 처음으로 태어난 걸 축하받는 기분이 들었다.

섀넌 하이트가 4월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나눔 장터에서 손님에게 옷을 보여주며 활짝 웃고 있다. 그녀는 한국미혼모가족협회가 미혼모 지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부받은 옷으로 바자회를 열자 자원봉사에 나섰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아이가 물었다 “이모는 엄마가 미워? 그래서 안찾아?”… 섀넌 하이트 이야기 ▼

어깨 위의 유령

주한미군 장교였던 아버지는 친자식인 세 남매를 포함해 다섯 자녀에게 공평하게 무뚝뚝했다. 나는 외출할 때 그런 아버지와 나란히 걷길 원했다. 그의 머리칼은 검은색이어서 뒤에서 보면 진짜 부녀지간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너희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애정의 격차를 드러냈다. 그녀는 열심히 사랑을 주려 했지만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필요로 하는지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작은오빠가 ‘show-and-tell(각자 물건을 가져와서 발표하기)’ 무대에 우리를 세우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오빠 친구들은 장난감 로봇이나 자전거, 최근 구입한 애견을 연단에 가지고 올라왔다. 우리는 ‘Korean sisters(한국인 여동생)’란 푯말을 목에 걸고 그것들과 나란히 ‘전시’됐다.

외삼촌은 가족 모임 때마다 우리 자매를 앉혀놓고 이죽이죽 웃으며 같은 걸 물었다. “어떻게 하면 너희 같은 쌍둥이 한국인 소녀를 얻을 수 있니?” 그가 ‘얻는다’는 뜻으로 쓴 ‘get’은 가게에서 인형 따위를 살 때 쓰는 동사다. 양부모는 농담으로 여겼는지 껄껄 웃을 뿐이었고 나는 눈치를 살피며 그가 원하는 답변을 했다. “한국의 고아원에 가 보세요.”

열네 살 때 떠난 가족여행에서 두 살 많은 작은 오빠가 자고 있던 언니를 성추행했을 때도 엄마는 방관자였다. 우등생이었던 언니는 그 일을 털어놓지 못하고 우울증을 앓으며 무너져 내렸다. 마약을 하고 커터 칼로 자살까지 시도했지만 엄마는 언니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몇 년 뒤 언니가 엄마와 함께 마약 재활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성추행 피해 사실을 털어놓자 엄마는 이튿날 오빠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서로가 원해서 벌어진 일이고 키스만 했어요.” 엄마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지난해 성탄절 가족모임에서도 외삼촌은 그 질문을 할 태세였다.

“내가 너한테 항상 묻는 질문 기억하니?”

나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봤다.

“네가 나한테 매번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해?”

허공을 향한 내 눈길이 싸늘해졌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양부모와 오빠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나직이 말했다. “한 번 더 물어봐요. 이번엔 딴 데 가보라고 얘기해 줄 테니까.”

삼촌의 ‘주둥이’를 다물게 하는 데는 3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논쟁을 즐기고 자기주장이 강했지만 집에선 유쾌하고 얌전한 딸을 연기했다.




2000년 미국 명문 사립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화려한 스펙의 성공적 입양 사례였다. 하지만 네 살 때 입양된 이후 우울한 기분에서 헤어나온 적이 없다. 그 우울감은 늘 어깨 위에 얹혀 있는 유령과 같았다.

고교 수업시간에 “숲 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 이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나무는 과연 쓰러진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그 기분이 설명되는 느낌을 받았다. ‘친엄마가 누군지 모르고 내가 태어나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다리를 잃은 참전용사가 귀환 후 다리가 간지럽다고 느끼는 것처럼 나는 거세된 네 살 때까지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만지려 해도 닿지 않고, 지우려 해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렵게 취직한 연봉 8만 달러짜리 직장보다 그 공허함을 메우는 게 더 절실했다. 나는 2007년 한국으로 떠났다.



나를 고아로 만든 사람들

‘나는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홀트아동복지회 담당자가 알려준 곳은 ‘경북 청도군청 앞’이었다. 기록은 ‘1984년 5월 22일 쌍둥이 자매가 청도군청 앞에 버려져 행인에게 발견됐다’고 적혀 있다. 내가 청도군청을 찾은 건 한국에 온 지 1년쯤 되던 가을이었다. 군청 직원은 발견되자마자 옮겨졌다는 보육원에 가보라고 했다.

하지만 언니와 내가 한국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정하나’ ‘정두나’는 명부에 없었다. 원장은 한참 자료를 뒤적이다 “그날 군청 앞에서 발견돼 우리 시설로 온 어린 자매가 있긴 해요. 근데 이름이 다르네. 정남희 정남정. 나이도 한 살 터울이고…”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몇 개 안 되는 어릴 적 정보마저 거짓일 수 있다는 ‘선고’로 들렸다. 하나, 두나. 언니와 나를 이어준다고 생각했던 그 이름이 가짜라면 유일한 혈육인 언니마저 친언니가 아닐 수 있었다.

난 혼란스러운 마음을 수습하기도 전에 정남희 정남정 남매의 가족들을 만났다. 우리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마주봤다. 나는 그들을 통해 정확한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기를, 그들은 내가 잃어버렸던 조카딸이기를 바랐다. “네 아버지의 누나”라고 밝힌 한 50대 여성이 나를 인근 시골의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이미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눈하고 입 모양새가 네 아버지를 빼닮았다”고 했다. “아주 판박이네.” “맞네 맞아.” 여기저기서 추임새가 터져 나왔다. 나를 가족으로 확신하는 분위기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기쁨을 느꼈다. 누군가와 닮았다는 말을 나는 몹시 갈망해왔다.

유전자 검사 결과 나는 그들의 조카가 아니었다. 언니와 난 다행히 친자매가 맞았지만 언니는 머리카락을 채취해 한국에 보내면서 이미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는 엄마의 호적에 올라가 있었고, 입양기관에서 입양을 성사시키려 고아 신분으로 세탁한 것이었다. 당시엔 고아만 해외로 입양 보낼 수 있어 이런 조작이 성행했다.



엄마의 과거를 만나다

나는 한국에서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며 한국어 공부에 집착했다. 내 입에서 나온 한국말을 귀로 들을 때 나는 잃어버린 기억에 다가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어가 능숙해져 다른 입양인이 생모를 만나러 갈 때 자주 통역을 해줬다. 그 일을 할 때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갈증을 난 드러내지 않았다.

차갑게 버림 받고도 부모를 찾으려는 입양인에게 쏠리는 동정의 눈길을 난 견뎌낼 수 없었다. 굶어죽거나 매춘부가 될 운명에서 양부모가 구해준 것이란 미국인들의 시선에 난 이미 지쳐 있었다. 게다가 친엄마가 나와 만나길 거부하기라도 하면 산산조각난 자존심을 복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감정 통제는 오랫동안 훈련해온 나의 주특기였지만 길에서 40, 50대 여성이 마주 오면 난 어느새 그들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내가 몰두한 건 미혼모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이었다. 나는 어린아이의 청량한 웃음소리를 동경했다. 입양서류에 붙은 사진 속 나는 심드렁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혼모는 내 엄마의 과거였고, 아이들의 미래는 나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엄마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이모는 엄마가 미워? 그래서 안 찾는 거야?”

형숙 언니의 아들 준서(7)가 나와 보드게임을 하다 물었다.

“난 엄마 없이 못 살 거 같은데. 엄마랑 있으면 좋잖아.”

준서는 천진한 목소리로 내 속내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머뭇머뭇하자 준서는 형숙 언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근데 엄마는 왜 나를 입양 보내려고 했어?”

“그래야 잘 클 줄 알았지. 이모네 엄마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엄마를 찾겠다고 마음먹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여든이 넘은 한 위안부 할머니와의 약속이었다. 위안부 할머니의 사연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해온 나를 할머니는 눈여겨봤다고 했다.

“방송 나가서라도 엄마를 찾아봐야지 왜 이러고 있어. 나도 당당히 얼굴 들고 사는데 뭔 얼어 죽을 놈의 자존심…. 너 엄마 찾으면 내가 춤출게. 나 사교춤 잘 춰.”



30년 만에 안 내 생일

3명의 심사위원 앞에 서자 평소 유창하던 한국말이 갑자기 어눌해졌다. 지난해 12월 한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의 본선 무대였다. “미국에서 온 섀넌 하이트입니다. 제 한국 이름은 정두나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어떻게 섀넌 양을 알아볼까요?”

“엄마한테 받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저를 알아봐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왔습니다.”

나는 미혼모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던 ‘내게 당신이 없다면(If I Ain't Got You)’을 불렀다. 노랫말이 엄마를 향하고 있다는 걸 난 그날 무대에서 새삼 느꼈다.

엄마에게 연락이 온 건 오디션 후 넉 달이 지난 즈음이었다. 엄마는 나를 수소문하다 내가 3년간 자원봉사를 해온 한국미혼모가족협회를 통해 나를 찾았다. 나 스스로 정한 첫 생일을 지낸 이틀 뒤인 4월 8일, 부산역에서 언니와 나를 본 엄마의 첫마디는 “우리 촌스럽게 울지 말자”였다.

수없이 상상했던 그 순간은 예상보다 편안했다. 입양의 기로에 선 미혼모들을 지켜보며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쌍둥이 딸을 잃은 엄마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였다. ‘미혼모와 입양인의 연대’는 내 석사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하다.

함께 지낸 며칠간 엄마는 유쾌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내가 성추행 얘기를 꺼내자 언니를 안고 오랫동안 눈물을 쏟았다. 한국에 온 지 몇 달 안 돼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돼 있었던 언니는 그때 엄마를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엄마를 만나 비로소 알게 된 게 있었다. 우리의 생일은 4월 22일이었다.



아들 준서로부터 입맞춤을 받는 형숙 씨. 그녀는 “엄마를 향한 아이의 마음처럼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요. 그런 사랑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보다 잔인한 게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아가… 며칠만 늦게 나와주면 안될까?”… 최형숙 이야기 ▼

방 안은 12시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뒤집힌 파자마가 널브러져 있고 책상 위 오디오에선 방금 전까지 듣던 태교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도 반복해 들어 숨소리처럼 익숙하던 멜로디가 선명하게 들렸다. A4용지 두 장 크기의 창문이 보이고 그 너머로 파란 하늘이 펼쳐지는 것도 평소대로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배 속의 준서가 사라진 것을 빼곤…. 위층에선 아기들 울음소리가 났다. 병원에서 아기를 데리고 퇴원한 몇몇 산모의 아기였다. 아직 꺼지지 않은 배 안에 준서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19 구급차가 도착한 건 12시간 전인 2005년 8월 11일 오후 11시였다. 방에서 혼자 진통을 하다 실신한 나는 황급히 구급차로 옮겨졌다. 구급차 안에서 정신을 차려 보니 문간에 챙겨 놓은 손가방도 실려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분홍색 노트를 꺼냈다. 준서를 낳기로 결심한 넉 달 전부터 하루도 안 거르고 쓴 일기장. 내 얘기를 들어준 건 일기장뿐이었다. 나는 누운 채로 벌벌 떨리는 손에 펜을 끼워 넣었다.

‘이제 네가 태어나려나 보다. 엄마가 지금 너무 아픈데 네가 태어나면 더 아플 것 같아. 며칠만 더 늦게 나와 주면 안 될까.’



생후 6시간 만의 이별

준서는 병원 도착 3시간 만에 태어났다. 회복실로 옮겨져서도 나는 일기장을 열었다. 옆 산모를 간호하던 할머니는 “애 낳고 바로 손을 쓰면 손목이 나간다”며 만류했지만 준서를 만난 기쁨을 털어놓고 싶었다. 일기장 안에서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축하했다.

‘간호사가 데려가기 전 잠깐 봤는데 너는 정말 하얗더라. 엄마 아빠는 둘 다 까만데, 너는 천사의 얼굴이구나.’

오전 9시, 개나리색 원피스를 입은 20대 여직원이 병실에 왔다. 아기가 태어난 지 6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간호사들은 준서를 데려올 준비를 하며 부산해졌다.

“부탁인데요. 우리 아기 발바닥 도장 좀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간호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도장 아저씨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10분이 지나도록 발도장을 찍는 사람이 오지 않자 원피스 입은 여직원은 말없이 휴대전화 폴더를 계속 여닫았다. 허겁지겁 달려온 발도장 담당자는 준서 발바닥에 잉크를 듬성듬성 바르더니 후다닥 찍어 냈다. 발 모양이 엉성하게 나와 불만이었지만 다시 해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입양 보내는 마당에 뭐 하러….” 누구도 내뱉지 않은 그 말이 귀에 맴돌았다.

여직원은 준비해 온 포대기로 준서를 감싸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 보세요.”

내 품에 안긴 준서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아기 주려고 직접 짠 포대기를 가져왔는데 그걸로 싸서 가시면 안 돼요?”

“포대기는 저희가 제작한 것만 쓰게 돼 있습니다. 아기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아가, 이제 그만 가.”

입양기관 봉고차가 준서를 태워 사라진 뒤 난 더는 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산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애란원으로 돌아왔다. 미혼모들이 모여 사는 그곳. 여기서 나는 준서를 키울지, 보낼지를 놓고 매일같이 마음이 바뀌었다.



오빠의 뒷모습

준서가 태어나기 두 달 전쯤 노란 머리의 외국인 양부모들이 애란원에 온 적이 있다. 그들은 기업 임원, 회계사,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입양기관이 주관한 한국 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찾아온 이 양부모들은 입양한 한국인 자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을 펴 보였다. 사진 속 남자 아이들은 마당의 풀에서 수영을 하거나 메이저리그 팀 유니폼을 입고 투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발레를 하거나 피아노를 쳤다. 주눅 든 산모들은 말없이 사진에 빠져들었다.

나는 얼마 전 지하철역에서 본 친오빠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오빠와 난 10년 전 고향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살며 매달 한두 번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임신이 되면서 6개월쯤 만남을 피하자 오빠는 내 안부가 궁금하다며 한사코 자취방으로 오겠다고 했다. 난 어쩔 수 없이 오빠를 마중하러 집 앞 지하철역에 나갔다. 출구로 나온 오빠는 멀찍이 서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오빠는 한동안 발을 떼지 못하다 몸을 돌려 올라왔던 출구로 도로 내려갔다.

이튿날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34년을 사는 동안 내 선택을 무조건 응원해 줬던 아버지는 “너를 믿은 게 후회스럽다”고 했다. 그날 난 미장원에 갔고 ‘머리를 자르고 보니 이젠 잘라야 할 것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된다’고 일기에 썼다. 나는 준서 아빠와 4년을 사귀다 헤어진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남들처럼 결혼을 할까도 했지만 그건 더 지옥일 것 같았다.

준서가 떠나고 빈손으로 애란원에 들어서는 내게 산모들은 말을 걸지 않았다.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도 이미 겪어 알고 있었다. 준서를 보낼 때 주려고 싸 놓은 선물 상자가 방 안에 덩그러니 있었다. 영어 시를 뜬 십자수와 돌잔치 옷, 한국 문화를 알게 해 주려고 광화문 주변에 나갈 때마다 챙겨 놓은 서울 시티투어 리플릿이 한 다발 들어 있었다. 산모들이 식사 자리에 모일 때마다 몇 명은 꼭 눈이 퉁퉁 부어 있곤 했는데 나도 그중 하나가 되어 갔다.

나는 난지도 쓰레기장에 준서를 버리고 온 환영에 시달렸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포대기에 싸여 울고 있는 준서가 눈에 아른거렸다.

준서를 보낼 순 없었다. 2주일 뒤 입양기관을 다시 찾았다. 그쪽 요구에 따라 미국 양부모에게 사과 편지를 쓰고 아기 인수증까지 써 준 뒤 준서를 다시 품에 안았다. 다른 산모들은 위약금으로 수백만 원을 내기도 한다는데 난 돈 안 물고 찾아온 것만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곰 세 마리

준서는 다행히 밝게 자랐다. ‘국민 동요’ 반열에 오른 ‘곰 세 마리’를 아이도 좋아했다. 이 노래를 불러줄 때마다 아빠의 빈자리는 더 커 보였다. 곰은 가족단위의 집단생활을 하지 않는 걸 나중에 책에서 보고 나는 동요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준서는 가끔 대중목욕탕 앞에서 드러눕곤 했다. 목욕탕 가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와 여탕에 갈 수 없는 나이가 되자 “목욕탕 데려가 줄 남자를 구해 오라”며 떼를 썼다.

준서를 낳기 전 나는 10년차 헤어디자이너였다. 출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근무하던 미용실에서 해고된 뒤 직접 미용실을 차렸다. 처음엔 월 수익이 500만 원쯤 돼 가게 운영이 괜찮았다. 하지만 서서히 손님이 줄더니 6개월이 되던 날 직원들 월급을 줄 수 없었다. 단골이던 한 여교사는 “형숙 씨가 결혼도 안 하고 애 아빠가 유부남이란 소문이 있다”고 귀띔해줬다. 유부남을 유혹해 아기를 낳은 것처럼 사실이 와전돼 있었다. 손님이 거의 여자여서 혼자 아이 키우는 사정을 조금은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여자의 적은 여자였다.

나와 떨어지길 싫어하는 준서는 유치원이 끝나면 미용실 앞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며 놀았다. 나를 부도덕하게 보는 건 상관없지만 준서까지 매도될 것을 생각하니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5월이면 준서 옷 사이즈를 묻던 친구

섀넌과의 인연이 시작된 건 그 즈음이다. 나는 미혼모들을 위한 활동가로 직업을 바꿨다. 준서가 받게 될 차별을 없애는 게 당장 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했다. 섀넌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달래듯 아이를 돌봐 줬다. 성격이 명랑해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줬지만 멍하니 허공을 볼 땐 그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준서를 입양 보낼 뻔했던 나는 섀넌을 보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려 했다.

아들을 입양 보냈던 한 친구는 매년 5월이 되면 준서의 옷 사이즈를 물어 왔다. 나보다 3개월 먼저 아들을 낳은 친구였다. 내가 사이즈를 말해 주면 친구는 “우리 애는 호주에서 크니까 그것보다 조금 더 크겠지”라며 매년 옷을 샀다. 5월 4일이 그녀 아들의 생일이다. 그녀가 해외 입양을 택한 이유는 다시 만날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국내 입양은 모두 비밀에 부치지만 해외 입양은 비밀 유지가 불가능해 엄마들은 그런 꿈을 갖는다. 그녀는 20년 후에나 올지 모를 운명적 손님을 기다리며 생일 선물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녀는 내가 섀넌 같은 입양인들과 가깝다는 걸 알고 질문 하나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친엄마가 잘살았으면 좋겠니, 힘들게 살았으면 좋겠니?” 잘살면 죄인이고, 못살면 아들이 커서 돌아왔을 때 도움을 못 줄 거라며 그녀는 갈팡질팡했다.

자식을 입양 보낸 부모들 모임을 만든 금주 언니를 돕게 된 것도 그 친구의 영향이었다. 자녀 생사조차 몰라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자식을 버렸다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숨어 지내는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섀넌과 나, 금주 언니는 미혼모에게 입양을 강요하는 부조리의 피해자였다.

“엄마, 여자 친구가 애 낳으면 내가 키우는 게 기본이겠지?” “엄마는 결혼 안 할 거야? 난 OO(유치원 여자 친구)랑 결혼할 건데.” 준서는 이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미혼모의 아들이란 멍에에 적응해 갔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준서가 며칠 전 입술이 터져 집에 왔을 때 난 미혼모라는 내 신분을 새삼 실감했다. 준서는 “다 엄마 때문이야”라며 가방을 집어던졌다. 학교 친구들이 ‘너희 엄마 미혼모야?’라고 묻는데 매일 똑같이 답해야 하는 게 싫어 짜증을 부리다 싸움이 났다고 했다.

그날 선잠이 든 나는 산신령이 나오는 꿈을 꿨다. 산신령은 “네가 원하면 아기가 생기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주겠다”고 했다. 한참 엉엉 울다가 가까스로 “지금 이대로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튿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미혼모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슬피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입양 간 아들을 30년 만에 만난 금주 씨가 3년 전 한국에 와 찍은 아들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금주 씨는 “그동안 못챙겨준 만큼 최고로 만들어주고 싶다”며 아들에게 임금 의복을 입히고 사진을 찍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현성욱’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노금주 이야기 ▼

여러 번 전화가 닿지 않던 그녀가 지난달 23일 사무실에서 우리와 마주 앉았다. 가슴에 ‘센터장’ 배지를 단 이 50대 여성은 회색 카디건을 여미며 다리를 꼬았다. “그래, 뭘 원하시는데요?”

내 옆에 앉은 제니(가명·29·여)는 텀블러를 만지작거리다 그 말에 손짓을 멈췄다. 제니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면서 입을 못 떼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었다. “제니가 29년 만에 미국에서 엄마를 찾으러 왔어요. 엄마 주민등록번호는 있는데 주소나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센터장은 엷은 미소를 띤 채 “누구시죠”라고 물었다.

“제니를 도우러 왔어요. 한국이 낯설고 우리말도 못 하니까….”

“어떻게 도움을 주신다는 건데요? 영어는 할 줄 아세요? 아님 돈으로 도와주세요?”

“그런 게 아니라 제니가 한 달 전 여기 왔을 때 엄마 연락처가 남아 있단 얘길 들었대요. 알아보고 연락주기로 했다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기에 그럼 같이 한번 물어보자고 해서 온 거예요. 저도 한가해서 온 게 아니고.”

센터장은 “뭘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건지 모르겠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팔짱을 꼈다.



아들이 살아 있었다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도록 돕게 된 건 2005년 ‘그 일’이 있은 후부터다. 위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 입원 수속을 하고 있을 때였다. 원무과 주변을 오가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한국사회봉사회입니다. 노금주 씨 되시죠? 현성욱이란 분 아세요? 선생님을 많이 보고 싶어 해요.”

현성욱이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우리 아들, 살아 있어요?”

아들은 입양인과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 석 달 뒤 나오기로 한 상태였다. 한국행 비행기 삯을 대준다기에 사연을 보냈다고 했다. 아들과 만나기까지 기다린 석 달은 헤어져 살았던 3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녹화 당일, 아들은 먼저 무대에 나와 있고 나는 무대 뒤 대기실에 있었다. 녹화가 지연돼 나는 아들을 코앞에 두고도 두 시간 넘게 보지 못했다. 대기실 안 흑백 모니터에서 무대 위 상황을 볼 수 있었는데 아들의 입국 장면이 담긴 녹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통해 입국장에 들어서는 아들의 얼굴을 봤다. 카메라 렌즈가 넓게 잡은 인파 속에서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생후 11개월 때 입양 간 성욱이는 나를 빼닮은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비로소 커튼이 열리고 나는 무대로 걸어 나갔다. 소복소복 쌓인 눈 위를 걷는 듯했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아들을 나는 힘껏 껴안았다. “아가야, 미안하다. 아….” 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말을 알아듣긴 한 걸까.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젖은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방송이 끝나고 아들과 말없이 맞담배를 피울 때 난 50년을 살며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

“친부모 동의 없인 못 알려줘”

센터장의 끝을 올리는 말투는 계속 내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입양인이 찾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친부모 동의를 받아야만 정보를 줄 수 있어요. 아직 동의를 얻지 못해서 알려줄 수 없다고 직원들이 얘기했을 텐데요.”

“답이 안 왔다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으라는 거예요? 엄마 찾겠다고 미국에서 휴직하고 들어온 건데.”

“그럼 저희가 뭘 어떻게 해야겠어요. 저희가 (친부모 측에) 전보를 보내요. 짐작할 수 있게 ‘몇 년 전 헤어진 분이 누구누구 씨를 찾고 있다. 어느 나라로 간 분이다’라고. 한 번만 보내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보내요. 전보 하나 보내는 것도 6000원이 넘어요.”

답답한 표정을 짓던 제니는 “Do you have any tea or water?(마실 것 좀 있어요?)”라고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어 제니가 한 번 더 물었지만 센터장은 가만히 있었다. 내가 “마실 것이 없느냐”고 묻자 센터장은 “물요? 저쪽 사무실 가면 정수기 있어요”라고 했다.

제니는 내가 종이컵에 받아 온 물을 들이켜며 말했다.

“You said six thousands bla-bla-bla. It's your job.(당신이 6000원이 든다 어쩐다 했는데 그게 당신들이 할 일이잖아요.)”

“Of course. Why not? Do you think I did not?(그럼요. 누가 아니래요?)”

센터장은 유창한 영어로 맞받았다. 제니는 한숨을 쉬며 탁자를 내려다봤다. 탁자 유리 안에는 ‘인연을 엮다’라는 글귀의 포스터가 끼어 있었다.



아들을 잃고 나를 생존하게 한 것

아들의 입양 사실을 알게 된 건 남편의 폭행을 피해 열흘간 집을 나갔다 돌아온 후였다. 남편은 내가 집을 나간 다음 날 돌도 안 된 성욱이를 친정집 앞에 두고 갔다. 친정엄마는 아기를 삼촌에게 맡겼고 삼촌은 내게 말도 없이 성욱이를 검은색 승용차에 태워 떠나보냈다. 엄마는 성욱이 때문에 남편에게 매여 살며 폭행에 시달릴 나를 걱정했다. 평생 2, 3세 지능으로 살아야 하는 장애 남동생을 돌봐 온 엄마는 발목 잡힌 삶의 지독함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나는 변소 앞에 모아 두던 농약병을 찾아 서성였다. 누군가 농약병을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둔 듯했다. 밤이 되면 뒷산 언덕 바위에 올라 밑을 내려다봤다. 달빛에 그림자가 보여 뒤돌아서면 거기엔 친정엄마가 있었다. 그녀의 모정이 새끼 잃은 나를 살게 만들었다.

재혼해 딸 유정이(가명)를 낳고 성욱이에게 못 준 사랑을 쏟아 부을 대상이 생기면서 나는 삶의 의욕을 서서히 회복했다. 밤에 문 밖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난 딸아이를 훔치러 온 것 같아 끌어안고 팔베개를 해 재웠다. 새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 둔 아들은 성욱이와 한 살 차이였다. 나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성욱이도 이만치 컸겠네’ 하고 생각했다. 새 남편과 이혼한 후에도 그 아이는 잘 잊혀지지 않았다.

하루는 미용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였다. 화면에선 딸을 입양 보낸 엄마가 어릴 적 딸 사진을 내보이며 찾고 싶다고 울먹였다. 그때 파마를 하던 한 중년 여성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찾겠다고 질질 짜고 자빠졌어.”



“연락 오면 친부모에겐 쇼크”

우리가 일어날 기미를 안 보이자 센터장은 타이르듯 말했다.

“20∼30년 전 아기 입양 보낸 거 비밀로 하고 새 남편 만나 가정 꾸린 사람한테 전보를 보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난처하지 않겠어요? 남편이 전보를 받아서 ‘왜 이런 걸 보내느냐’고 의심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건 일부 어려운 케이스를 얘기하시는 거죠.”

“그런 케이스가 많아요.”

“저도 입양 보낸 아들을 찾아봐서 아는데 친부모들이 자식 찾으려고 입양기관에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고 주변만 빙빙 맴도는 경우가 수두룩해요.”

“그런 사람은 일부겠죠. 20∼30년을 잊고 지냈는데 애한테 연락 오면 진짜 쇼크예요.”

“그 사람들이 잊고 지냈다고 생각해요?”

“다들 새로 결혼해서 애도 낳았을 텐데 지금 키우는 자식처럼 매번 생각하고 그러겠어요?”

“지금 키우는 애보다 마음속으로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부모가 더 많아요. 엄마 못 찾으니까 ‘죽어서라도 엄마를 만나겠다’고 유서 쓰고 자살한 아이도 있어요.”

“뭐 그런 사람들도 있겠죠.”



“유정이는 내가 키우겠다”

아들이 한국에 올 때면 서울 인사동 거리로 쇼핑을 갔다. 못 사주고 못 보여준 것들을 빨리 채워줘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아들의 눈길이 조금이라도 머무는 물건은 주저 없이 샀다. 그러기 위해 나는 매번 200만∼300만 원씩 빚을 냈다. 공장에서 자동차 부품의 불량을 가려내는 일을 해 버는 월 120만 원으로는 딸과 친정엄마, 장애 남동생을 부양하기에도 벅찼다.

아들이 내 집에 한 달간 머문 3년 전 여름, 나와 성욱이, 딸 유정이는 안방에서 나란히 붙어 지냈다. 허리 디스크가 재발해 일을 못 나가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통원치료를 받던 때였다. 나는 “유정이가 아직 어린데 엄마가 자꾸 아파 큰일이다. 엄마 죽고 나면 어떻게 하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누워 있던 성욱이는 불쑥 일어나 손가락으로 유정이를 가리키더니 다시 제 가슴을 콕콕 찔렀다. 용케 내 말을 알아듣고 “엄마가 없으면 내가 유정이를 키우겠다”며 몸으로 말한 거였다.



“현재에 집중해요”

센터장과의 설전은 막바지로 가면서 누그러졌다. 센터장은 제니를 가엾게 쳐다봤다.

“우리도 부모 찾는 일 도와주고 싶어요. 근데 그게 불가능할 땐 잊어버리세요. 에너지를 과거에만 쏟아 부으면 에너지를 잃잖아요. 현재에 집중해요.”

통역 자원봉사자가 “Focus on the present.(현재에 집중해요)”라고 말을 옮기는 순간 제니는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제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성과가 없어서 어떡해. 미안해 죽겠네”라고 하자 센터장은 “미안할 게 뭐 있어요”라고 했다.

입양기관 건물을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니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목도리로 입을 가리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면담 내내 밖에서 기다리던 섀넌과 형숙은 제니에게 우산을 씌워주려 다가갔다.



에필로그

11일은 정부가 국내 입양 활성화를 위해 제정한 ‘입양의 날’이다. 그날 섀넌형숙, 금주는 ‘싱글맘 데이’ 행사를 연다.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대신 친부모 손으로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로 미혼모 단체가 지정한 날이다. 세 여인은 꿈꾼다. 당장은 싱글맘 데이가 많이 알려지길 바라지만 그날 자체가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을.

신광영·김성모 기자 neo@donga.com



▶ [채널A 영상]지워지지 않는 이름 ‘엄마’…입양아-미혼모들의 사연
▶ [채널A 영상]각자 입양된 쌍둥이 자매, 25년 만에 서로의 존재 알아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