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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혼자 밥 먹는 박근혜, 수첩부터 버려라

입력 | 2013-04-01 03:00:00


김순덕 논설위원

오랜 독재와 부패로 악명 높던 공룡 정당이었다. 대통령 후보자는 변화와 약속을 강조했지만 콘텐츠 부족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그러나 더 무능한 집권당이나 불안한 좌파야당 대신 국민은 그를 선택했다. “어떻게 부패정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느냐”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난달 10일 취임 100일을 맞은 멕시코의 제도혁명당(PRI)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 얘기다. 지금은 ‘멕시코 혁명’과 ‘위대한 화합 모델’에 경탄하는 세계 언론의 사설이 줄을 잇는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뒤 100일이 1년보다 길게 느껴지는 우리로선 배가 아플 정도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멕시코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긍정적’으로 올려 평가했다.

만일 박 대통령(이라고 계속 쓰자니 너무 길고 권위적이다. GH나 PP는 쓰지 말라니 ‘바꾸네’로 쓰련다. ‘박근혜가 바꾸네’는 새누리당 대선 표어였다)이 야당 대표들과 ‘한국을 위한 협약’을 내놓고 정책 집행에 들어갔다고 상상해 보시라. 그랬다면 바꾸네 정부가 성장률 전망치를 내려잡으며 수십조 원의 국채 발행을 입에 담는 사태가 벌어지진 않았을 것 같다.

멕시코는 그렇게 했다. 취임식 바로 다음 날 대통령은 두 야당 대표와 95개 개혁조치를 담은 ‘멕시코를 위한 협약’ 서명식을 가졌다. 취임 일주일 만에 대대적 교육개혁법안을 의회에 냈고 여소야대의 상하원 통과 뒤 대통령 서명까지 마쳤다. 멕시코 경제의 활력을 잡아먹는 유무선통신과 에너지시장의 독점 폐지 법안을 내놔 글로벌 시장의 열광적 반응도 얻었다.

1962년 우리나라 1인당 소득이 87달러였던 시절, 3000달러 소득을 자랑했던 멕시코였다. 현재는 우리의 절반 소득에 불과하지만 골드만삭스는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를 능가할 국가로 멕시코를 한국과 묶어 미스트(MIST·멕시코 인도네시아 남한 터키)라고 명명했다. 1989년 1만 달러대에서 우리와 소득이 역전된 뒤에도 부패가 전체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경제위기로 번져 국민의 절반을 빈곤선에 몰아넣은 멕시코가 드디어 ‘아스텍 타이거’로 변신한 거다. 대체 비법이 무엇이었을까.

결국은 대통령이다. 작년 7월 대선과 총선 후 니에토는 야당 대표와 차기 정부 과제를 논의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구국의 정신으로만 시작한 건 아니었을 터다. PRI는 또 정권을 잃을까봐 성공에의 의지를 불태웠고 두 야당은 자기네만 물먹을까봐 한 달씩 돌아가며 여야협의체 대표를 맡아선 차기 정부의 큰 틀을 만들어냈다. 니에토는 전임 우파정부의 장관과 좌파야당 전 대표를 내각에 영입함으로써 여기선 말만 듣고 구경도 못한 대탕평 인사까지 해냈다.

남의 나라 얘기라고 바꾸네는 시큰둥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야 정쟁에 미국이 무너질 판이라며 “정치권은 멕시코를 보라”고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피를 토하는 사설을 썼다. “야당은 협조하려고 기다리는데도 가져오는 게 없다”는 뒷말이 나올 만큼 바꾸네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통령이 암만 위대한 비전을 지녀도 국회가 법을 통과시켜야 실현 가능한데 인사에서 여당까지 따돌렸다. 일각에선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대통령이냐” 비아냥댈 정도로 혼자 식사하며 묵은 수첩만 들여다봤다.

대선 공약이 지켜져야만 국민이 희망을 갖는 게 아니다. 경제는 심리라고 했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으로도 나라 경제에 피가 돌게 할 수 있음을 멕시코가 보여준다. 언제나 국민을 생각한다는 바꾸네가 진정 국민 행복을 원한다면 여럿과 여러 번이라도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대통령에게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그 귀한 시간을 독식한다는 건 국가적 자원 낭비다.

낡아빠진 수첩은 바꾸네를 과거에 매달리게 한 요물이었다. 수첩 대신 지금 이 순간의 국민의 가슴을 들여다보면 더 중요한 일이 안 보일 리 없다. 첫 수순은 자기 살을 도려내는 제의(祭儀)여야 한다. 니에토는 기득권 체제의 한 축이면서 공교육의 공적(公敵)이었던 교원노조위원장을 부패 혐의로 전격 구속함으로써 시퍼런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역외 재산은닉과 세금 탈루 혐의의 한만수 전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에게 3월 3일 납세자의 날에 준 모범납세자 포상부터 바꾸네는 공개 박탈하기 바란다. 수첩만 믿고 지명한 그가 2006∼2010년 어디서 어떻게 소득을 올렸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한 수사를 촉구할 필요가 있다.

극단 좌파도, 부패 우파도 용납할 수 없었던 국민이 ‘안철수 현상’을 불러왔다. 지금처럼 부패 공화국을 방치하고서는 ‘지하경제 양성화’ 같은 바꾸네 정부의 개혁 구상은 코웃음만 살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가 니에토 취임 전의 멕시코처럼 전락한다면, 바꾸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부친 박정희를 욕보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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