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투어/설혜심 지음/412쪽·2만3000원 웅진지식하우스
18세기 독일 화가 요한 조파니가 그린 ‘우피치의 트리부나’.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이 갤러리는 엄청난 명화와 귀중품이 전시돼 그랜드투어를 떠난 명문가 자제들이 꼭 들리던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뭐, 뻔한 얘기다. 베이컨이 했으니 있어 보이지. 그 정도쯤 다들 안다. 솔직히 여행 아닌 뭘 대입해도 교육 되고 경험이 쌓인다.
그래도 여행은 가슴이 뛴다. 여유만 있다면 마다할 리 없다. 더구나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쪼들려도 무리를 한다. 유람이건 연수건 상관없다. 내 자식 경험 키우는 거라면 빚이라도 낼 판이다.
사실 그랜드 투어는 서민에겐 꿈도 꾸기 힘든 여행이다. 당시 외국에서 몇 년씩 머물 여유를 누구나 부리겠는가. 속을 들여다보면 더하다. 몸종에 보디가드, 안내인까지 거느리고 흥청망청 사치하는 재력을 감당할 부모는 극소수다. 영국 사상가 존 로크는 파리에서 첨단 패션을 좇아 하도 옷을 사 입다가 빈털터리가 됐다는 대목도 나온다. 가난했던 문학가 새뮤얼 존슨은 부자 친구 가족을 따라 늦은 나이에 겨우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안하무인이던 상류층 자제들이 부모 슬하를 벗어났으니 방종도 많았던가 보다. 쾌락에 빠져 병을 얻거나 거액의 도박 빚을 지는 일이 허다했다. 외국어와 문화 배우라고 보냈더니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사고치는 일도 빈번했다. 여성 시인 메리 워틀리 몬터규는 “젊은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얼마나 타락해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요즘 언론에서 자주 문제 삼는 ‘조기교육의 폐해’쯤 되는 형국이다.
하지만 그런 잡음에도 그랜드 투어는 긍정적인 측면이 컸다. 만사 편하게 살던 ‘우물 안 개구리’들이 큰 세상을 겪어보는 건 큰 경험이다. 해외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도 미래의 자산이 됐다. 사실 그랜드 투어는 교육 커리큘럼이 꽤 탄탄했다. 그 나라의 인문학 수업을 듣고, 예술 체육 등을 익히는 과정이 즐비했다. 당시 영국 공교육은 ‘개판 5분 전’이었다고 한다. 지금과 달리 옥스퍼드조차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고픈 부모에게 그랜드 투어는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이 책은 참 근사하다. 소재 자체도 신선하고, 당시 유럽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책에 들인 공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자료 모으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오밀조밀 잘 엮어 읽는 맛도 풍부하다. 국내 저자가 이런 주제를 책으로 엮어 내다니, 감히 ‘별 ★★★★☆’를 드리고 싶다.
설혜심 교수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