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실패는 타산지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엔 외부와의 소통을 중시하고 참모들의 직언도 적극 수용했다. 그러나 10월 유신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차지철 경호실장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박 전 대통령도 주변의 직언에 귀를 닫았다.
○ 특별보좌관들을 외부 소통 창구로
1969년 박 전 대통령은 당시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특별보좌관 구성을 지시했다. “가급적 대가(大家)보다는 연구 성과를 올리고 있는 젊은 교수 중에서 병역을 마친 사람, 대학, 출신 안배도 고려해 인선을 해보라”고 했다는 것. 김 실장은 두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외교 국방 경제 사회 교육 등 각 분야 최고 인재를 뽑았다.
특보들은 해당 분야의 학계, 언론계 등의 여론을 박 전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박 전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박 전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방향을 시중에 전파하는 역할도 했다. 특보들은 신청만 하면 언제든지 박 전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특보로 젊은 교수 아니면 내각 수장을 이미 지낸 이들을 주로 임명했다고 한다.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을 만한 인물들을 일부러 고른 것이다. 특보가 장관직을 노리고 현 장관에 대한 약점을 찾아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번 대선 때 이주영 특보단장 밑에 국방안보, 통일외교, 여성, 일자리, 벤처 등 각 분야 전문가들로 특보 10여 명을 임명했다. 이들은 공약에 대한 의견을 당선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박 당선인은 취임 이후 소수의 특보를 임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 박정희, 임기 막판 직언에 귀 닫아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의 장막에 둘러싸여 제대로 민심과 소통하지 못했고 측근들의 직언에 귀를 닫았다는 게 당시 측근들의 공통된 얘기다. 당시 차 실장은 교수나 주요 여론 지도층과의 식사 자리를 주선해 거기에 박 전 대통령을 합석시키면서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차 실장은 매주 금요일 서울 경복궁 연병장에서 전투 장갑차, 대포까지 동원해 화려한 국기하강식을 열었다. 이 행사에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과 재벌 총수까지 불러 배석시키고 30경비단 군인들로부터 경례를 받으며 위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박승규 민정수석이 박 전 대통령을 찾아가 “수개월째 차 실장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세간에 말들이 많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이 “당장 집어치우고 못하게 하라”고 해 중단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박 전 대통령도 심리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차 실장의 문제를 지적해도 짜증을 내는 횟수가 늘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박 전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차 실장은 경호를 이유로 직언할 만한 인물이 박 전 대통령의 곁에 가는 것을 차단했다.
특히 선거를 치를수록 지지율이 떨어지고,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 이후 국민들의 큰 저항에 부딪히자 박 전 대통령은 “국민들 밥 좀 먹고 살게 해 놓았더니 이것도 이해 못하나”라고 국민을 탓하며 귀를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