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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졸업이란 화살표… 쉼표… 마침표…

입력 | 2013-02-02 03:00:00

● 3인의 졸업을 통해 본 끝남과 시작 사이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함께했던 시간은 이젠 추억으로 남기고/서로 가야할 길 찾아서 떠나야 해요.’

GS칼텍스 신입사원인 정석영 씨. 신원건 기자 laputa@daonga.com

지난해 20, 30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는 발매된 지 20년도 넘은 노래가 하나 등장한다. 그룹 015B가 1991년 발표한 ‘이젠 안녕’이다. 평범한 노래방에서 시작된 노래는 드라마의 ‘추억’이라는 코드와 맞물려 시청자에게서 묘한 감정을 자아낸다.

이 노래는 오랫동안 만났던 친구들과 헤어질 때 생기는, 엇갈리는 여러 감정을 담은 탓에 졸업식 때 애창되는 곡이기도 하다. 사실 졸업식과 노래의 가사는 딱 맞아 떨어진다. 가족들에게 축하를 받을 때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기쁨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러다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는 친구의 뒤통수라도 보게 되면 금세 아쉬운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연락해”라는 인사를 주고받지만, 모두가 예전처럼 자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야말로 추억과 아쉬움, 약속이 가득한 순간이다.

우리에게 졸업은 무엇이었을까.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가 세가지 서로 다른 졸업 이야기를 들어 봤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졸업이 문장부호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화살표, 새 시작을 위한 쉼표, 긴 여행의 마무리를 짓는 마침표로 이들의 졸업 이야기를 재정리했다.

‘화살표’ 또 다른 20년의 시작


GS칼텍스 신입사원인 정석영 씨(29)의 청춘은 치열했다. 그래서 그에겐 졸업이 더 값지다. 재수를 해서 2004년에 입학했는데 졸업까지 꼬박 9년이 걸렸다. 군대에 다녀온 2년을 빼더라도 7년이니 8학기(4년)를 기준으로 한다면 졸업이 3년 늦어진 셈이다.

대책 없이 놀다 그리된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젊은이의 특권인 ‘도전’에 썼다. 2008년 가을 복학한 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9년은 공부를 하느라 통째로 휴학했다. 그러고도 떨어졌다. 재수도 했고 몇 차례 굴곡도 있었지만,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명문 사립대 학생에게 실패는 여전히 낯설었다. 점점 불안감이 엄습했다. ‘1년을 공부해서 또 떨어지면 어떡하지?’ 불안은 집중을 방해했다. 결국 공부를 포기했다.

정 씨가 분석해 낸 패인은 하나다. 맹목적인 열정이다. 그냥 주변에서 회계사가 좋다고 하니 시작한 공부였다. 숫자가 좋았거나, 회계사란 직업에 끌린 것은 아니었다. 함께 공부를 시작한 친구는 결국 한두 해 더 공부해 회계사가 됐다. 어쨌든 그는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마지막 학기이던 지난해 가을 그는 ‘카드’ 하나를 숨기고 있었다. 졸업 요건 중 하나인 독일어 점수였다. 취업이 될 때까지 점수를 학교에 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백수’라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졸업은 두려움이었다.

“저만 그런 건 아니었죠. 취업할 때까지 졸업을 미루는 친구가 꽤 많았으니까요. 정말 외로웠습니다. 모두 지쳐 있어 의지할 곳도 없었고요.”

지난해 12월, 그는 드디어 독일어 점수를 학교에 제출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직후였다. 이달 그는 대학에, 아니 ‘처절한 취업 준비생’이란 타이틀에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직원’이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진짜 인생은 지금부터다. 그는 쉰을 앞둔 자신을 떠올리며 펜을 들었다.



친구!

어색하더라도 이렇게 부르는 게 편하겠다. 길고 길었던 대학생활이 이제 다음 달이면 끝이 난다. 졸업은 내게 ‘새로운 시작을 이룰 수 있게 해 준 스승’ 같은 존재인 것 같아. 요즘 대학생들에게 졸업은 취업에 성공한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자격이지. 나도 그랬잖아. 2, 3년 전에 벌써 했어야 할 졸업을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느라 차일피일 미뤄 왔지. 내 나이 서른이 다 돼서야 그 자격을 얻게 되니 감회가 참 남다르다.

친구! 나도 20년 후의 내가 참 궁금하다. 아마 세월이 흘러 젊은 패기는 사라졌겠지. 이마에 잡힌 주름만큼 삶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을 거고. 그러나 그동안 쌓아 온 네 경험을 신뢰했으면 해. 성실히 살았다면, 그 노력과 경험은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를, 그러니까 20년 전의 네 모습을 생각해 봐. 새로운 시작에 한껏 설레던 모습을 말이야. 시작은 언제나 삶에 동기를 부여하지. 젊은이가 아름다운 이유는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중년의 너도 항상 ‘새로운 시작’을 즐겼으면 해. 재능이 있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친구! 항상 새롭게 너 자신을 자극했으면 해. 그것만큼 멋진 일은 없으니까. 졸업이라는 끝맺음이 나에겐 새로운 시작을 뜻해. 나는 지금의 이 설렘, 지금의 이 열정을 앞으로도 잊어버리지 않을 생각이야. 수없이 만날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겨 보려고 해. 20년 뒤 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나의 소신이 그대로 살아 있다면 정말 좋겠다.

친구! 졸업 축하해 줄 거지?

‘쉼표’ 인생은 계속된다

11년차 수학교사인 김나연 씨. 신원건 기자 신원건 기자 laputa@daonga.com

고등학생 때 김나연 씨(34·여)는 졸업만 하면 모든 것이 바뀔 줄 알았다. 만화 ‘요술공주 밍키’에서 밍키가 마법을 부려 어른으로 변하는 것처럼.

“어른으로 변신한 밍키를 보면서 ‘대학생은 저런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어요. 그때는 고교 생활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어요. 대학에 가면 엄청나게 새로운 생활이 열릴 것 같았죠.”

하지만 ‘평범한’ 인생은 계속됐다. 그가 진학한 이화여대 사범대는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3월이 됐지만, 그는 고등학생 때 걷던 캠퍼스를 똑같이 걸었다. 단지 대학 교재를 손에 들고 있었을 뿐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곳은 여전히 신촌과 홍대앞 거리였다. 그제야 ‘졸업을 해도 내 삶은 어제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공부하고 노는 모습이 어제와 다르지 않더라고요. 고등학생 때는 졸업만 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만 같았는데 말이죠.”

대학 졸업 후에도 ‘평범한’ 삶은 계속됐다. 2003년, 그는 수학 선생님이 돼 모교로 돌아왔다. 수능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자주 ‘뒷담화’ 타깃으로 삼았던 담임선생님의 동료 교사가 됐다. 나연 씨는 이제 11년차 교사가 됐다. 석사 학위를 받았고, 평소 꿈꾸던 상담 공부도 하고 있다. 일주일 뒤, 그는 제자들의 졸업을 지켜보며 자신의 인생에 쉼표를 하나 더 찍게 된다.

졸업식에서 교사는 조연이다. 나연 씨는 “졸업식 자리는 왠지 교사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황망한 마음에 교무실로 돌아오면 잠시 멈춰 있던 현실이 선생님들을 맞는다. 새로운 학생을 맞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쌓여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교사들은 금세 일상으로 복귀한다. 가끔 졸업생들이 교무실로 들어와 사진을 찍고 나가지만, 그뿐이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다음 학년도 일정이 어떻게 되죠?”, “얼른 짐 싸서 (다른 교무실로) 이사해야지” 같은 말들만 오간다. 교사에게 졸업은 잠시 쉬어 가는 순간이다.

그는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졸업이 쉼표가 되길 바란다. “진학만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에 자기 인생에 섣부른 마침표나 느낌표를 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 애들이 이제 막 싹을 틔운 씨앗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죠.” 그는 아이들에게 짧은 축사를 남겼다.



얘들아!

너희를 처음 만났던 그 계절이 다시 왔구나. 시작은 항상 설렘과 기대, 두려움과 떨림, 대단한 결심과 함께 했었지. 이제 졸업을 하고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너희를 떠올려 본다.

너희가 졸업식을 치르는 곳에서 선생님 역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단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기대와 떨림…. 아직도 생생히 느껴져.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졸업은 고등학교를 끝마치던 날을 기억하기 위해 찍어 둔 쉼표에 지나지 않았단다. 내가 졸업을 했다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하는 건 아니었어.

여린 너희는 학교라는 틀을 벗어나 더 거친 세상을 만날 거야. 그곳에서 겪을 비바람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쓰려 오는 듯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알고 있단다. 너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비바람을 견디고 이겨 낼 것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품은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이것만 기억해 다오. 졸업은 끝이 아니라는 것. 어제와 오늘, 내일은 늘 연결돼 있다는 것. 그리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부디 제대로 된 삶의 목표를 세우길 바란다. 대입이나 취업만을 목표로 사는 삶은 그 시작부터 실패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너희가 ‘어떤 분야에서, 어떤 사람이 돼서, 어떻게 살겠다’라는 목표를 세운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야. 나아가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자신의 목표에 가까워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거란다. 너희가 그런 사람이 되리라고 믿는다.

사랑한다, 나의 아가들아. 너희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내 삶의 목표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었어. 고맙다, 진심으로.

마침표 임자영 씨 ‘금혼’ 없어져 52년만에 학사모… 돌덩이 벗은 기분

‘52년 만에 찍은 ‘마침표’

이화여대 졸업생 임자영 씨(가명)의 손

이화여대가 금혼 학칙을 바꾼 것은 2003년. 임자영 씨(가명·71)는 그 이듬해 자신이 재입학할 수 있게 된 걸 알았다. 1960년 국문과에 입학했던 그는 집안 사정 탓에 2학년 1학기를 휴학했다. 2학기 때 바로 복학해서 4학년까지 다녔지만, 졸업을 하려면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다. 그런데 결혼을 했다. 이렇게까지 후회할지 모른 채 그냥 남편을 따라나섰다. 그 길로 40년이 흘렀다.

“늘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었죠. 목적지가 분명 있었는데, 그 목적지 자체가 없어진 기분이랄까.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큰 바위가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어요.”

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주었으니 그가 돌아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막내 손녀를 맡아 키우고 있었는데, 학교에 가겠다고 아들 내외에게 덜컥 부담을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손녀가 어느 정도 자란 뒤엔 친정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어머니는 100세가 넘도록 사시다 2010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당시 자영 씨의 나이는 예순여덟이었다. 늦었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더 미룰 수는 없었다. 2011년 가을학기에 등록한 그는 무려 5과목이나 수강신청을 했다. 그리고 당당히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땅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가 있었어요. 그 나무의 뿌리를 다시 정돈해 땅에 잘 심었어요. 그러면 그 나무는 다시 잘 자랄 거예요. 잎도 푸르게 나고, 열매도 맺고. 전 뿌리가 뽑힌 나무였답니다. 땅에 뿌리를 묻고픈 나무처럼 저 역시 평생 졸업을 기다려 왔어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도 그리던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창피해서였단다. 그 대신 가족과 함께 그들만의 졸업식을 미리 가졌다. 학교에서 사진도 찍었고, 맛있는 외식도 했다. 그가 꿈꿔 왔던 순간은 그렇게 기쁨 속에서 마무리됐다. 그는 친구들에게 못다한 말을 편지로 남겼다.



얘들아 잘 있지?

난 반세기가 지나 졸업을 했어. 그것도 벌써 1년 전 일이구나. 졸업 시즌이 다가오니까 새삼 감회가 새로워진다.

내가 한 학기를 못 마쳐 졸업하지 못한 걸 속상해했을 때 너희들이 그랬지. “지금 와 무슨 소용이야?” “칠십이 넘어서 박사 할래?” “취직하려고 스펙 쌓을래?” “왜 사서 고생을 해?” 그렇게 한마디씩 하면서 나를 말렸지. 그러나 난 기어코 해냈어.

50년이 넘는 동안 내가 얼마나 큰 돌덩이를 안고 살았는지 너희는 모를 거야. 내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세 가지 중 제일 첫 번째가 졸업이었다면 너희는 여전히 나를 신기하다 할 거야. 졸업은 내 인생의 뿌리를 안착시키는 일이었단다. 난 마치 길을 이탈해서 혼자 외롭게 무리를 찾아 헤매는 한 마리의 어린 양과 같았거든. 그만큼 졸업은 나에게 절실했어. 왜냐고? 그게 마무리니까.

한 교수님께서 그러시더구나. “네? 60학번이시라고요? 그때는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손녀 같은 아이들이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더라. 분당의 집에서 신촌 학교까지 왕복 5시간이 걸리는데, 칠순 노구가 왜 괴롭지 않았겠니. 강의를 들을 때는 분명 이해가 됐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지. 너희들도 이해할 수 있지?

그러나 조물주는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그래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진리를 주셨어. 나는 50년 만에 돌아간 학교에서 그런 교훈을 배웠단다. 오늘도 작년에 받은 졸업장을 다시 꺼내 보곤 흐뭇하게 웃었어. 이 아름다운 세상에 머물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때까지 우리 건강하게 잘 지내자. 안녕!

권기범·김창덕 기자 kaki@donga.com
▼윤석중 선생이 정부 요청받고 급하게 만든 ‘빛∼나는’ 장수▼

1946년 6월,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사가인 윤석중은 문교부로부터 ‘졸업식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광복된 조국에서 열리는 졸업식에서 학생들이 부를 변변한 우리말 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급하게 가사를 지어 작곡가 정순철과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정 씨는 윤 씨가 쓴 가사를 받아들고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노래를 불러가며 곡을 완성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우리들은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희망과 다짐을 노래하다

노래의 마지막 소절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윤 씨의 책 ‘어린이와 한평생’(1985년)에 따르면 본래 졸업식 노래는 낮은 음으로 끝나는 노래였다. 그런데 노래를 들은 문교부 담당자가 “노래가 너무 처진다”며 끝 음을 높여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노래의 마지막 음은 지금과 같은 ‘높은 도’로 바뀌었다.

‘윤석중 연구’의 저자인 동화작가 노경수 씨는 이를 두고 “노래를 높은 음으로 끝마쳐 보다 희망찬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해야 할 만큼 힘든 광복 직후였기 때문에 더더욱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선 윤 씨도 마찬가지였다. 3절의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이라는 가사는 윤 씨가 일제강점기에 흥얼거리곤 했던 경구를 옮긴 것이다. 그는 당시 힘들 때면 “절벽에서 떨어져도 폭포 물은 다시 살고, 서로 갈린 시냇물은 바다에서 만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나와 사회를 노래하다

졸업식 노래는 1990년대 즈음해서 관련 대중가요가 나오면서 좀더 세련되게 바뀌기 시작했다. 가사에서도 ‘언니들과의 공식적인 이별’이 아닌 개인적 아쉬움과 그리움이 보다 솔직하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1989년 발표된 이지연의 ‘졸업’은 ‘아름답던 우리의 추억 따스했던 우리들 마음, 이젠 다시 올 수 없어도 우리 잊지 마오’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전람회가 1997년 발표한 노래 ‘졸업’엔 ‘얼굴은 밝지만 우리 젖은 눈빛으로 애써 웃음 지으네. 세월이 지나면 혹 우리 추억 잊혀질까 봐, 근심스런 얼굴로 서로 한 번 웃어보곤 이내 고개 숙이네’란 가사가 담겼다. 2004년 가수 서영은이 부른 ‘졸업’에도 ‘아쉬움’ ‘눈물’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1990년대 이후의 졸업 노래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유입됐다”며 “연애나 로맨스, 사랑 같은 감정들을 졸업과 연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가 ‘졸업’(2010년)이라는 노래를 내놓았다. 밴드는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등의 노랫말로 이른바 ‘88만 원 세대’의 불안을 노래했다. 김 씨는 “졸업을 하더라도 무턱대고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세태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1950년대 이야기다. ‘졸업식 노래’ 1절의 ‘꽃다발’은 본래 마음으로 주는 꽃다발을 의미했다고 한다. 꽃다발을 선물할 만큼 여유로운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노랫말처럼 졸업식만 되면 꽃다발을 선물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이전 세대의 ‘희망’이 실체를 갖게 된 것이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