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자택의 거실 겸 작업실에서 전통 염색에 대해 설명하는 이병찬 선생.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음성이 낭랑하고 온화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그래서 이중적이다. 푸르기에 상큼하고, 푸르기에 아련하다. 옛 시절, 새색시는 첫날밤 쪽빛 이불을 다리며 볼을 붉혔다. 구중궁궐 대왕대비는 홀로 된 한숨을 씹으며 쪽빛 치마를 지었다. 남색(藍色)이란 말론 차마 형언할 길 없는 우리네 마음. 쪽빛은 삶의 꽃망울과 뒤안길을 보듬어 아우른다.
이병찬 선생(81)이 쪽빛에 사로잡혔던 세월도 그 탓이리라. 염색연구 30여 년. 그 첫 연정은 지금도 시리도록 은은하게 맴돈다. 쉰이 가깝던 1978년, 일본인 친구가 자랑스레 꺼내든 기모노의 색감은 영 잊혀지질 않는다.
허나 굳센 다짐을 현실은 받쳐주지 않았다. 배우려 해도 가르치는 데가 없었다.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 6개월 염색 기초를 익혔다. 귀국 후 곧장 문헌을 밤낮으로 훑고 전문가들을 구슬렸다. 그렇게 찾아낸 게 청대(靑黛), 마디풀과 쪽이었다.
이병찬 선생이 염색한 비단. 합성염색과 달리 색이 탁하지 않고 선명하며, 부드러운 빛이 감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주위 분들이 도와준 덕이죠. 여인네가 홀로 버텨내니 장해보였나 봐요. 아직도 그 첫 쪽빛이 어른거립니다. 만족스러워서? 아니에요. 이제 시작이구나. 우리 것을 복원할 수 있겠다. 쪽빛도 더 개선하고, 감물 진달래 가래나무 연지꽃…. 산천에 흐드러진 색깔을 되찾자. 가슴 저 편에 새싹이 돋았어요.”
너무 염색만 파고든 홑실이었을까. 외로움과 절망이 수시로 밀려왔다. 10년이 넘도록 예술계에선 그의 작품을 홀대했다. 왜색이 짙다, 정통성이 아쉽다. 나무는 서 있을 뿐이건만, 바람이 잦아졌다. 문헌을 뒤져가며 염색도구까지 직접 만들며 분투했는데…. 가산도 거의 탕진한 1980년 후반, 처음으로 포기를 떠올렸다. 이제 그만 접자. 한 시절 여한 없으니 그걸로 됐지 않나. 입술을 깨물던 차,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1990년)이란 낭보가 들려왔다.
선생은 요즘 몸이 편치 않다. “이런 얘긴 남우세스럽다”고 당부했지만, 맹장에 문제가 생겨 복막염으로 번졌다. 여든 하나. 거동도 조심스러운데 곧 수술까지 앞뒀다. 괜히 인터뷰를 요청했나 죄송스러워하자 “응대가 수월찮아 오히려 미안하다”며 다독였다. 짓궂게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연유를 물어도 “친구도 많고 주위에 좋은 분이 넘쳐 낙낙하게 보냈다”며 걸걸하게 웃어넘겼다. 염색에 묻혀 강산 바뀌는 걸 세 차례나 품은 공력. 그래도 혹 아쉬움이 남진 않았을까.
“없어요. 정말 없어요. 한때 마음을 콕콕 찔렀던 가시들도 시간 가니 무뎌졌어요. 다만 지치 색을 좀더 대량 공급할 방도를 구하지 못한 건 영 가슴을 맴도네요. 보라색과는 또 다른, 그 짙은 푸른빛은 지치 뿌리에서만 얻을 수 있거든요. 너무 희귀하고 비싸요.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꼭 찾아야 하는데…. 퇴원하면 또 연구해야죠.”
4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선 이 선생의 특별전이 열린다. 칠보 노리개와 능화문 서첩, 한지 부채와 두루주머니…. 숨을 고르고 향취에 스며보자. 영롱하되 넘치지 않는다. 단아하면서도 화사하다. 그 멋과 맛을 누구라서 낮춰 볼까. 천진기 민속박물관장은 “이 땅에서 자란 식물로 빚은, 우리 산천이 선사한 색의 감동은 끝이 없다”며 “두절되고 쇠퇴됐던 전통 염색을 홀로 다시 세운 그 정성을 마주할 기회”라고 전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