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민 산업부 차장
하지만 구하는 것보다 내려놓는 게 훨씬 어려웠다. 전기, 수도, 신문, 인터넷, TV 같은 서비스는 신청하는 것보다 해지하고 예치금을 돌려받는 게 더 번거로웠다. 돈을 들여 구입한 세간은 통째로 넘겨받기로 한 분이 막판에 취소하는 바람에 귀국을 열흘쯤 남기고 하나하나 인터넷에 올려 팔아야 했다.
돌아와서 지인들에게 미국에서의 1년을 사람의 한 평생에 빗대 이야기하곤 했다. 1년을 84세의 삶이라고 보면 1개월은 7년 꼴이다. 첫 달(0∼7세)에는 뭐가 뭔지 모르고 주변 도움으로 생활하다 3개월(21세)쯤 지나면 돌아가는 사정을 어렴풋이 알게 되며 6개월쯤 됐을 때(40대)는 요령을 피울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새로 일을 벌이기보다 정리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귀국 두 달을 남긴 시점(70세)부터는 마음만 급해졌다. 회사에 복귀하는 날짜가 진즉 정해져 있는데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한 해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팁 같은 게 없을까 찾다가 ‘잉크(Inc)’ 매거진에 실린 글을 발견했다. 필자는 마케팅 전문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케빈 돔 씨. 매년 12월을 ‘단절(disconnect)’ 기간으로 정하고 훌쩍 여행을 떠났던 그는 올해 ‘R’로 시작하는 5가지를 실천하겠다고 적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 해를 복기하는(Reflect) 것이다. 그해 최고의 성취를 이룬 사례를 5가지 꼽아 본 뒤 어떤 행동 패턴이 뒷받침돼 있었는지 자문해 본다. 더 좋은 것은 거꾸로 5가지 실패 사례를 적어 보고 어떻게 하면 되풀이하지 않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머지 네 가지는 중요한 사람에게 다시 연락하기(Reconnect), 이미지 전환(Reposition), 휴식(Relax), 도움이 되는 사람 끌어오기(Recruit) 등이다.
돔 씨의 조언은 연말을 흥청망청 보내지 않고 새해에 자신의 경력과 성과를 높이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활용하려 할 때 참고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조언보다 앞선 원칙은 일을 시작하고 실행할 때 마무리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매사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가볍게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돌이켜 보면 미국 생활을 정리하기 어려웠던 건 그만큼 삶이 무거웠다는 뜻이다. 고작 1년인데 공짜로 줘도 미련이 남지 않는 세간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는 연말연시에 자주 연주되는 곡 가운데 하나다. 그 가운데 합창곡인 ‘저 하늘은 주의 영광 나타내고’를 들으며 눈을 감아 본다. 이 순간에도 광대한 우주에선 뭇별이 엄숙한 침묵 속에 제자리를 지키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돌고 있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엄중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