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서 사라진 백호주의, 아직도 머릿속엔…”
[호주의 한인들이 떨고있다] 인종폭력 83%가 아시아계 집중
“차에서 갑자기 백인 5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주먹과 발로 마구 때리곤 사라졌죠.”
호주의 주요 대학 중 하나인 뉴캐슬대 한국인 유학생들이 겪은 인종폭력 사례다. 이 대학 총학생회는 8월 외국인 유학생들이 겪은 인종폭력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인 등 유학생을 노린 현지인의 범죄가 잇따르자 학생회가 나서 지난해 8월부터 1년간 피해 신고를 받아 분석한 결과다.
조사 결과 모두 163건의 인종폭력 사례가 집계됐다. 신체폭력이 40건, 언어폭력이 123건이었다. 피해자 중 한국 등 아시아계 유학생이 135명으로 전체의 82.8%에 달했다. 중동지역 출신이 20명(12.3%), 아프리카 5명(3.1%), 오세아니아 2명(1.2%) 순이었다. 유럽이나 북미 유학생은 1명씩에 불과했다.
인종차별 피해를 당해도 경찰이나 학교 당국에 제대로 신고조차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체폭력 피해자의 15%, 언어폭력 피해자의 61%가 혼자 끙끙 앓다 학생회에 처음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한국인 유학생 정모 씨는 “막상 신고를 해도 별 도움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참고 넘긴다”며 “유학비자 취소 같은 불이익을 받을까봐 폭력에 맞설 엄두를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 정부 주도 다문화 정책의 한계
최근 호주에서 한국인들이 범죄 대상이 된 것은 호주 다문화 정책이 한계에 다다르고 경제 침체가 맞물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호주는 전체 인구의 4명 중 1명이 해외 출생자이고 호주에서 태어난 이민자 2, 3세까지 포함하면 인구 절반이 이민자 출신인 다민족 다문화 국가다. 하지만 호주 백인들의 다문화 인식이 미국 캐나다 등 다민족 국가에 비해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용승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위원은 4일 “법제도로서 백호주의(백인 이외 인종 이민 제한정책)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이데올로기인 백호주의가 국민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호주 스캘런재단이 2009년 국민 4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민자나 유학생에게 반감을 드러낸 비율은 10%에 달했다. 민족이나 종교 등의 이유로 최근 1년 이내에 차별을 겪었다는 응답도 10%였다. 5.8%는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 인종차별을 겪는 등 지속적으로 차별받는다고 응답했다. 2005년 레바논계 무슬림 청년 집단폭행 사태나 2009년 인도 유학생 연쇄 테러는 호주 백인들이 다문화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례다.
○ 인종차별은 경제 위협하는 자충수
최근 호주의 경기침체도 이런 흐름을 가속시키고 있다. 호주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원자재 수요가 감소하면서 자원 부국으로서 입지가 축소되는 등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곽재석 이주동포정책연구소 소장은 “경기침체로 자국민의 실업은 느는데 교육열이 높은 한국 등 아시아인들은 전문직 종사자가 많아지면서 애꿎은 한인 이민자나 유학생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유학 및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호주 경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자국 경제의 ‘큰손’인 아시아 고객을 잃게 되는 자충수가 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호주 정부가 최근 일련의 한인 폭행 사건에 대해 “인종범죄로 볼 근거가 없다”는 시각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인 유학생은 중국(15만9691명)과 인도(7만2801명)에 이어 2만9933명으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호주 유학 비용으로 지출하는 돈만 연간 16조 원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