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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제주에 찬 바람이 불면 녹차향이 섬을 감싼다

입력 | 2012-09-22 03:00:00

Special-차 마니아 사랑방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제주 오설록(서귀포시 안덕면)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번 들러볼 만한 곳이다. 다양한 차와 다기는 물론이고 광활한 차밭을 거닐며 뛰어난 경치를 즐길 수도 있 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에 조성된 이 차밭은 제주 올레길과도 이어져 있다. 제주=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18일 정오 무렵 제주 제주시 용담동과 서귀포시 대정읍을 잇는 1135호 지방도로. 날씨는 맑고 쾌청했지만, 전날 지나간 제16호 태풍 ‘산바’는 제주 곳곳을 할퀴어 놓았다. 지붕이 날아간 데다 쓰러진 간판이 출입구까지 막아버린 펜션이 눈에 띄었다. 강풍에 옆으로 45도 정도 돌아가 버린 속도제한 표지판은 전날 불어닥친 바람의 위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초가을 햇살을 만끽하며 40여 분 만에 도착한 곳은 오설록 티뮤지엄(Tea Museum). 우리나라 최초의 차 전시관이자 체험장이다. 이곳은 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꿈의 장소’로 불린다. 다양한 종류의 차와 다기, 그리고 끝이 없는 듯 펼쳐진 광활한 차밭을 함께 즐길 수 있다.

티뮤지엄 옆의 차밭은 국내 최대 규모(79만 m²·약 24만 평)이자 최대 차 생산지인 서광다원이다. 도순다원, 한남다원과 함께 아모레퍼시픽이 제주에서 운영하는 3개 다원 중 하나. 서광다원이 있는 곳은 원래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였다. 추사는 초의선사가 제주까지 찾아와 심어준 차나무를 가꾸며 다도를 즐겼다고 한다.(두산백과 참조)

서광다원은 원래 잡목이 우거지고 돌이 많은 불모지였는데,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인 고(故) 서성환 회장이 1983년부터 방풍림을 만들며 개간해 오늘에 이르렀다. 평소 녹차를 즐겼던 서 회장은 생전에 1000년을 이어온 우리 차 문화가 사라져 버린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차 재배의 최적지를 찾아 1974년부터 제주의 3대 오지에 차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제주는 기후가 온난하고, 강수량이 많으며, 특히 안개가 많이 끼는 등 중국과 일본의 이름난 차 생산지와 비슷한 재배 조건을 갖췄다.

○ 봄 새순이 전해주는 에너지

1 오설록 티뮤지엄 직원이 차 덖는 작업을 시연하고 있다. 2 한 해 1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티뮤지엄 전경. 3 유약없이 구워 만드는 제주 옹기 다구. 강스철 작가 작품. 제주=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아모레퍼시픽제공

티뮤지엄 안으로 들어가자 세계 각국에서 건너온 다양한 찻잔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국의 본차이나 명품들과 서양 최초로 도자기를 만든 독일 마이센 찻잔 등이 벽면 하나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그 옆으로 길이 7∼8m, 폭 1m 정도 되는, 거대한 통나무로 만든 바(bar)가 나타났다. 방문객들이 다도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나뭇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바 위에 팔을 얹는 순간 나무가 지닌 따뜻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기자 일행이 의자에 앉자 4년차 티 소믈리에인 이진주 씨가 다구(茶具)와 차를 내왔다. 그가 가져온 것은 오설록이 자랑하는 프리미엄 차 4가지. 마치 프랑스의 유명 와이너리를 방문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씨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다구에 눈길이 쏠렸다. 평소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제주 옹기 다구(강승철 작가 작품)다. 제주 옹기는 육지의 옹기나 도자기와 달리 겉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굽는다(차 색깔을 보여주기 위해 다구 안쪽에는 흰색 유약을 바르기도 한다). 제주 토양 속의 풍부한 유기물이 유약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처음 맛본 것은 어린 찻잎으로 만든 일로향과 세작. 일로향은 ‘세계 챔피언 녹차’다(북아메리카 티 챔피언십 덖음차 부문 2009, 2011, 2012년 우승). 국내에서 가장 어린 찻잎으로 만든다. 제주의 온화한 기후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른 4월 5일경에 찻잎을 수확할 수 있게 해 준 덕분이다. 세작은 곡우(穀雨·양력 4월 20일 전후) 즈음 거둬들인 찻잎으로 만든다.

차를 마시는 순서는 술의 그것과 같다. 맛이 약한 것부터 강한 것의 순서로 마신다. 진한 차를 먼저 마시면 연한 차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 기자는 먼저 일로향 잔을 들었다. 고개를 들고 차향을 맡으려는데 의외로 향이 너무 연해 뭐라고 설명할 거리가 없다. 그런데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 순간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연하지만 오묘하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세련된 고소함과 담백함, 그리고 연한 뒷맛이 느껴졌다. 이른 봄의 산나물 맛처럼 말이다. 이 씨는 “초봄 찻잎의 은은한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평이 많다”고 했다.

이어 세작을 마셨다. 원래 세작은 쓴맛이 적고 아미노산이 많아 감칠맛을 내는, 고급 녹차의 대명사다. 그런데 묘하게도 일로향 맛의 여운 탓에 평소보다 떫고 쓴맛이 더 많이 느껴졌다.

다음은 젊은이들이 좋아한다는 영귤 블렌드 차. 제주에서 나는 영귤(라임과 레몬의 중간 정도인 새콤한 맛이 나고 보통 귤보다 크기가 작다)과 찻잎을 섞은 것이다. 새콤하고 상큼한 맛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탓에 생긴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은 오설록에서 개발한 한국형 후발효차(중국에선 푸얼차가 대표적이다) 삼다연이었다. 70∼80도의 물에 우려 마시는 녹차와 달리 발효차는 100도에 가까운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낸다. 중국차와는 다른, 묵직한 맛과 독특하고 쌉쌀한 향이 인상적이었다.

시음을 마치고 차밭을 둘러보기로 했다. 여름에 비해 약해지긴 했지만 초가을 햇살은 제법 따가웠다. 동행한 이는 설록차연구소의 이민석 박사. 그와 기자는 차나무 재배와 연구 현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차나무에 새싹이 나는 봄도 좋지만, 가을이야말로 차를 마시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설명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따뜻한 차를 드셔 보세요. 비염이나 알레르기가 있는 분은 즉시 진정 효과를 보실 수 있어요. 차를 마시는 것은 혈액순환과 심신 안정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놀라운 것은 서광다원이 100% 유기농 재배를 하면서도 일반 차밭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차나무가 원래 병충해에 강한 편이긴 하지만 유기농 재배를 하게 되면 생산량이 원래보다 절반 가까이 줄 수 있다.
▼ 추사 김정희의 향수를 달랜 그 맛이 그립다 ▼

“저희도 처음엔 이전보다 40% 정도 생산량이 줄었어요. 일본 사람들은 저희가 유기농을 한다니까 ‘미쳤다’며 손가락질을 했었지요. 그런데 차츰 노하우가 쌓이면서 생산량이 이전의 80% 수준까지 올라갔습니다. 원래 저희 농원의 생산성이 꽤 높은 편이었으니 그 정도면 정말 괜찮은 수준이죠. 지금도 저희가 관리하는 다원(제주 3곳, 전남 1곳)의 면적은 전국 차밭의 5%이지만 생산량은 24%나 됩니다.”

유기농 덕분인지 차밭 여기저기에서 유난히 벌레가 눈에 많이 띄었다. 발걸음에 놀란 메뚜기들이 수시로 펄쩍거렸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다. 이렇게 벌레가 많은데도 해충이 없는 것은 페로몬(곤충의 의사소통에 쓰이는 화학물질)을 이용한 선별적 방제 덕이다. 서광다원에서는 암컷 나방의 페로몬으로 수컷 나방을 유인해 제거하고, 교미행위도 교란해 개체 수를 줄였다. 해충의 천적인 거미 등이 늘어난 덕도 봤다. 비료는 바닷새의 분뇨가 퇴적된 구아노와 유채박 등 천연물질만 쓴다. 최근에는 유기농 등 재배 기술을 제주 지역 농가에 보급하고 있기도 하다.

설록차연구소는 차나무 종자 개량과 다양한 제품 개발에서 국내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인도, 스리랑카, 중국, 대만, 일본 등 주요 차 생산국에서 수집한 수천 종의 유전자원을 기반으로 우수한 형질을 가진 차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첨단 장비를 이용한 녹차 성분 화장품과 약품 원료 개발도 활발하다. 특히 최근에는 돌연변이종에서 기존의 차나무에는 없었던 새로운 약효 성분을 찾아내기도 했다. 바로 주름 개선과 피부노화 방지 효과가 있는 앱솔루친 227K다. 여기서 K는 Kilo, 즉 1000을 뜻한다. 227K는 성분 선별과 분석을 22만7000번 거쳤다는 의미다. 연구원들의 땀과 노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국형 발효차 개발 역시 설록차연구소가 독보적이다. 아직까지 국내의 차 제품 생산은 거의가 녹차 위주로만 되어 있다.

한편 설록차연구소의 후발효차 개발 과정엔 미생물과 관련한 재미있는 사실이 숨어 있다. 본래 후발효차의 맛은 차를 발효시키는 미생물이 좌우한다. 푸얼차의 맛은 중국 윈난 성 푸얼(普) 지방의 토착미생물에서 나온다. 설록차연구소는 한국형 발효차를 만들기 위해 수십 종의 미생물로 실험을 진행했다. 김치 유산균으로 차를 만드니 김치 맛이 나고, 일반 유산균으로 만든 차에서는 요구르트 맛이 나는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마침내 찾아낸 것이 된장을 만드는 고초균. 이 미생물로 만든 차는 한국인의 입맛에도 맞고 혈액순환 등 여러 가지 기능성도 충족시켰다. 오설록 후발효차인 삼다연은 찻잎을 3년간 발효한 후에 100일간 동굴 속 삼나무 통에 넣어 풍미를 살린다.

○ 갓 덖어낸 차의 향기

차밭에는 마지막 수확을 앞둔 새싹들이 이발을 한 듯 깔끔하게 깎인 차나무 덤불 사이로 올라와 있었다. 기자는 문득 직접 만든 차를 마셔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설록 측의 양해를 얻어 녹차 새싹을 한 주먹 땄다.

다시 돌아온 티뮤지엄. 기자가 딴 찻잎을 간단하게 덖고(수분을 없애며 약하게 볶고) 손바닥으로 비벼 만들어낸 ‘즉석 차’와 갓 덖은 세작을 이진주 소믈리에에게 부탁해 맛볼 수 있었다. 방금 덖은 차는 평소 마시던 세작보다 2배는 맛있는 것 같았다. 덖는 과정을 거쳐 차의 수분이 줄어들면 구수한 향과 맛이 강해지고 떫은맛이 줄어든다. 일반 가정에서도 프라이팬에 아주 약한 불로 차를 볶는다는 느낌으로 덖어주면 된다. ‘즉석 차’는 미세하게 새콤하고 상큼한 맛이 났다. 이 씨가 “예상외로 괜찮다. 풋내가 나지만 단맛이 강하고, 어린잎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고 칭찬을 해줬다.

기쁜 마음으로 다시 차밭으로 나왔다. 투명한 가을 햇살과 맑은 바람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올레길과 연결된, 야트막한 차나무 사이의 길을 따라 끝없이 걷고 싶었다. 10월 중순이 되면 동백꽃을 닮은 차 꽃이 만개한다고 한다. 그때 다시 이곳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제주=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