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폐허를 응시하라/레베카 솔닛 지음·정해영 옮김/512쪽·2만 원·펜타그램시스템 책임진 국가 엘리트권력 오판이 되레 피해 키워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한 뉴욕 맨해튼과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들이닥친 뉴올리언스의 갈라진 땅 이미지를 합성했다. 저자는 재난을 맞아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재난 공동체’를 통해 인류가 잃어버린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역설적으로 확인한다. 펜타그램 제공
그러나 과연 대형 재난이 이 같은 디스토피아의 모습이기만 한 것일까. 세계 각국의 재난기록을 조사하고 수많은 재난 피해자를 인터뷰해온 저자는 재난 속 인간행동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재난은 지옥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종종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대중이 패닉에 빠져 폭동을 일으킨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주장은 소수 권력자의 두려움이 불러일으킨 상상이다. 2001년 9·11테러 당시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있던 수천 명은 아무런 통제 없이도 두 줄로 서서 계단을 내려오며 침착하게 대피했다. 오히려 재난을 당했을 때 가장 큰 위험요소는 ‘엘리트 패닉’이다. 시스템 붕괴에 당황한 국가기구 엘리트의 잘못된 판단이 피해를 걷잡을 수 없이 확대시키는 사례가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재난 속 대중의 실제 행동은 어떨까. 많은 사람이 ‘대중은 이기적이며 재난 후엔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난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대부분 구조대가 아니라 이웃 생존자들이다. 저자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를 돕는 과정에서 잊고 지내던 유토피아를 떠올리고 강렬한 기쁨을 체험한다”고 말했다.
“이재민의 천막들, 문짝과 덧문과 지붕 조각으로 얼기설기 얽어놓은 우스꽝스러운 길거리 급식소들이 도시를 점령하자 유쾌한 소란은 일상이 되었다. 달빛이 비추는 긴긴 밤 내내, 사람들은 어디서건 천막에서 흘러나오는 기타와 만돌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급식소를 지나칠 때면 어둡고 후미진 곳에서 은밀한 도피처를 찾은 연인들이 나지막이 소곤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때도 있었다. 혼인신고 담당 공무원은 1906년 4월과 5월에 혼인신고서 발급 건수가 그 어느 해 같은 기간보다 많았다고 증언했다.”(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 우편배달부 에드윈 에머슨의 증언)
이처럼 재난에서 유토피아가 발견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자는 “재난은 원인이 분명하고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지만, 고립된 현대인에게는 복잡하게 꼬인 일상이 더욱더 재난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대재난은 혁명이나 종교 축제와 유사한 성격마저 띤다.
“많은 혁명 반대자들이 동의하듯이 만일 ‘혁명이 재난’이라면, 그 이유는 ‘재난 역시 일종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재난과 혁명은 연대와 불확실성, 가능성, 체제의 전복과 같은 측면들을 공유한다. 규칙들이 깨지고 많은 문이 열린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