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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볼셰비키한테 배운 ‘주사파 정치’

입력 | 2012-05-21 03:00:00


황호택 논설실장

‘블라디미르 레닌을 영수로 하는 러시아 볼셰비키는 쿠데타로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소비에트 정부를 출범시킨 후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볼셰비키가 반대파를 억압하는 가운데 실시한 선거에서 사회혁명당 우파는 370석을 얻었다.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연합해도 215석에 지나지 않았다. 제헌의회가 열려 사회혁명당 우파 등 반(反)볼셰비키 세력이 권력 이양을 요구했지만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사회혁명당을 불법화했다.’(김학준, 러시아 혁명사)

레닌은 러시아어로 ‘다수’라는 뜻인 볼셰비키를 자파(自派)에 제멋대로 갖다 붙였다. 제헌의회 자유선거에서 볼셰비키는 소수임이 증명됐지만 그들은 ‘다수’를 강탈했다.

볼셰비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테러와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레닌의 무장혁명대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강도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은행도 털었다. 이렇게 빼앗은 돈을 볼셰비키의 상층부가 제 주머니에 채워 넣은 일도 있었다. 볼셰비키는 부르주아들의 지배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법질서는 애써 지킬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1970년대 말 한국에서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란 지하단체가 무장행동대의 군자금 마련을 위해 볼셰비키를 흉내 내 금은방과 동아그룹 회장 집을 털었다.

러시아 혁명 방법론 학습해 실천

1980년대 젊은 대학생들은 광주의 비극과 전두환 군부독재에 절망한 나머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대안(代案)을 찾았다. ‘진보의 그늘’(시대정신 간)을 펴낸 한기홍 씨(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1980년대 좌파 운동권은 독해용(讀解用) 일본어를 속성으로 배워 마르크스 레닌이나 마오쩌둥 저작의 일본어 번역본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사상뿐 아니라 방법까지도 학습했다. 컴퓨터 부정경선을 당당하게 옹호하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수결을 무시하고 폭력을 주저하지 않는 통합진보당 주사파의 행태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수단의 정당성을 따지지 않는 볼셰비키 투쟁 방법의 복사판이다.

빅토르 세르주가 저술한 ‘러시아 혁명의 진실’ 한국어판에는 노르웨이 오슬로대의 박노자 교수의 추천사가 실려 있다. 귀화한 러시아계 한국인 박 교수는 추천사에서 “혁명은 투표와 다수결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전란 중인 나라에서 오로지 설득을 통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전위계급이 역할을 다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볼셰비키가 제헌의회 투표 결과를 폭력으로 뒤엎어버린 것은 혁명의 전위대가 다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야 ‘올바른 사회’로 나아간다는 독선(獨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이 글에서 “과연 우리가 통념적으로 아는 의회민주주의만이 유일한 민주주의냐”는 의문을 던진다. 볼셰비키가 지향한 것은 민중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라는 외피(外皮)를 두른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러시아 혁명에 뛰어들었던 세르주의 이 책은 사회변혁을 도모하는 모든 이의 필수적 참고서라고 박 교수는 추천했지만 21세기 한국에서 1910년대 러시아식 사회변혁을 도모하는 세력이 있다면 황당한 시대착오일 것이다.

통진당 사태에서 20세기 초 러시아를 횡행한 볼셰비키의 귀환을 보는 듯하다. 새파란 여대생이 50대 공동대표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흔드는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권파들은 폭력으로 회의를 방해하고, 중앙위원회의 다수결은 무시했다. 러시아 혁명 때 상대적으로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던 멘셰비키(소수파)처럼 통진당 비(非)당권파는 들러리나 서주다가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인가.

1980년대 자생(自生) 주사파의 원조는 지금 중국에 억류 중인 김영환 씨다. 김 씨와 함께 민혁당 활동을 하다 전향한 홍진표 씨(국가인권위 상임위원)는 “어차피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는 것이라면 이미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구현한 북한을 우군(友軍)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수기에서 밝혔다. 김, 홍 씨를 비롯한 많은 주사파가 북한의 현실을 목도하거나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을 보며 사상적 전환을 했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 현실정치로 뛰어든 주사파들은 공개적인 전향을 한 적이 없고, 북의 지령대로 움직였던 과거 행적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의회 진출로 합법공간 확보 전략

1990년대 말까지는 의회를 “혁명에서 이탈한 수정주의”라고 치부하던 주사파가 왜 기를 쓰고 의회에 들어가려고 하는가. 종북세력이 의회라는 합법공간으로 진입해 합법과 비합법 투쟁을 병행하려는 전략을 세운 것 같다는 분석이다. 북한 노동당 225국이 지령문에서 ‘국회 의석을 양보 받으라’고 한 것을 보면 북의 대남(對南)전략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수법으로 무장한 주사파들로부터 의회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이 19대 국회의 중요한 과제가 됐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