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사무실에서 ‘자살 영주 중학생의 형, 눈물로 쓴 편지’(동아일보 4월 18일자 A2면)를 읽다가 억장이 무너졌다. 열일곱 살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담은 ‘부치지 못한 글’이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차마 눈물 없이는 읽지도 못하겠고 옆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눈물을 줄줄 흘렸다. 동통이란 게 이런 것일까. “내 동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하다. 너무 미안하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내 동생 집에 있을 것 같다. 학교 갔다 왔다고 나랑 카드게임 할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안 믿긴다. 형이란 게 동생 힘든 거 모르고 장난만 쳐서 미안하다… 못해준 것밖에 생각이 안 난다. 개그콘서트 구경시켜 줄게. 사랑한다. 내 동생. 제 동생 자살중학생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이날 신문 A16면에도 ‘KAIST 학생, 또…’라는 제목의 기사가, 그 밑에는 ‘안동서 성적비관 여중생, 아파트 투신 숨져’라는 기사가 있었다. 정말로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고 외면하고 싶은 뉴스들이다. 22세 대학생은 가족에게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행복한 가정은 없을 겁니다’라는 메모를, 룸메이트에게는 ‘형 간다. 못 놀아줘서 미안하다. 행복하게 잘 살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그뿐인가. 여중 2년생은 ‘공부를 해봐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공부를 못해도 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라는 유서를 남겼으니, 이 노릇들을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철부지라고 나무랄 수만은 없지만, 제 목숨 제가 끊은 저들이 미워도 너무 밉다. ‘야 이놈들아, 너희가 생명을 아느냐? 마지막 순간에 한 번이라도 남은 부모 형제를 떠올렸어야지’ 마구 야단을 치고 싶다. 정말 그렇게 될 놈이라면 사정없이 때려주고 싶다. 나쁜 짓, 죄악이고 또한 범죄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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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은 감옥 창살에 싹을 내민 들꽃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숨을 쉬는 생명이란 그런 것이거늘.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꽃봉오리를 피워야 사람이다. 제발 빌고 또 빌겠다. 이 땅의 어여쁜 아들딸들아. 그 까닭이 무엇이든,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그것만은 제발 하지 말아다오. 제발, 제발, 제발.
최영록 경기 성남시 분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