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그의 예측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중년 남성이 겪는 위기를 얘기하고 있다.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남자는, (결코 그렇게 될 리는 없지만) 아직도 자신의 젊음을 믿고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모험을 감수할 심리적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새로운 여성에게 버림 받고, 자신이 가족의 소중함을 잠깐 잊었다며 참회하는 눈빛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웬수’를 가족이 용서하고 안 하고는 그 다음의 얘기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심지어 ‘다른 여자’도 없이 가족을 떠난 사람은 가족의 가치를 ‘잊은’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이다. 아니, 세상과 자신의 가치를 잃은 사람이다.
청춘은 꿈으로 가득차 있는 시기
40대 초반부터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꿈들은 하나씩 ‘착각’으로 밝혀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인 ‘비현실적 낙관주의’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40대 초반에 거울을 보면 예전의 모습은 간데없고, 자신이 혐오하던 배 나온 아저씨가 서 있다. 한때 미치도록 아름다웠던 아내는 어디 가고, 10여 년이면 참 오래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회사에서는? 임원은커녕 당장 내년이 걱정된다. 자식의 성적표를 볼 때마다 친자식인지 의심스럽다. 노후 준비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사회적 금전적 물질적 성공이나 자녀 교육 같이 그동안 자신을 앞만 보고 달리게 한 대부분의 가치는 객관적 증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런 중년들이 갑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이 너무 앞만 보고 살았다고, 아내를 더 사랑했어야 했다고, 자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고. 사실은 객관적 지표로 명확히(잔인하게?) 드러나는 가치로는 승부가 안 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로 새로운 착각에 빠져보려는 시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야 그 가치를 찾았다고 기뻐하는 중년 남성을 대부분의 가족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동안 가족들이 수도 없이 얘기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중년 남성들이 저녁이면 소줏집에 모여 신세를 한탄하고, 일요일이면 산에 모여 먼 산을 쳐다본다.
남은 30년을 위한 착각의 선택을
바람나지도 않았는데 집을 나간 남자들은 대개 성찰을 너무 ‘쎄게’ 한 이다. 그들은 모든 걸 내려놨기에 이제는 진짜 안 돌아온다. 나머지 중년들은 대부분 억울하다고 토로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착각이다. 그들이 앞만 보고 달릴 때 그 물질적인 가치를 미리 내려놓은 극소수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한, 그들은 분명 선택한 것이다. 이제 그 결과가 두려운 것일 뿐이다.
하지만 과거의 선택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분노하고 있기에는 아직 30년 이상의 새로운 ‘선택지’가 남아 있다. 우리는 매번 지나고 나면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선각자를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후회한다. 그러나 지금 남이 하지 않고 내가 하지 않았던 선택을 한다면, 30년 후에는 누군가가 나를 선각자로 봐줄 것이다. 지금까지 어쩔 수 없어서 달려 왔다고 믿는 나와 같은 중년들에게는 남은 30년을 위한 새로운 착각의 선택이 절실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