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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부터 반성해야 할텐데 만날…”

입력 | 2012-02-18 03:00:00

[O2/내 인생을 바꾼 그것]운동선수 꿈꾸던 청년, 결핵 시련 통해 하느님 부름 받아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의 폐결핵




“설교는 설교하는 자신을 먼저 반성하는 것이 돼야 할 텐데, 만날 반성이니깵 어려워.” 김성수 주교는 겸손하다. 그런데 그 겸손에서 꾸밈을 찾기 어렵다. ‘강화도 우리마을’에서 김 주교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강화=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X선 사진을 보면서 의사가 말했다. “아드님…, 오래 못 살겠습니다.” 장남에게 내려진 날벼락 같은 선고에 어머니는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그 얼마 전, 하얀 얼음판에 왈칵 피를 쏟았을 때만 해도 몸보다는 경기가 우선이었다. 가뜩이나 선수가 모자란 아이스하키팀에서 자신마저 빠지면 경기 자체가 불가능했다. 집으로 돌아와 마당 수돗가에서 몸을 씻을 때 웩 하며 다시 쏟아진 핏덩이. 비내가 진동했다. “짜식들아, 내가 피를 쏟으면 바케쓰(양동이)로 하나야”라며 허세도 부려 봤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배재중 6학년(현 고교 3학년) 김성수(82·대한성공회 주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젊은 급성 폐결핵 환자는 ‘죽을 날’만 기다릴 뿐이었다. 반년여 뒤 6·25전쟁이 터졌다.》

허송세월

“우쭐했던 바보였어.” 아주 폼 난다고 생각했다. 광복 후, 아이스하키 스틱을 어깨에 메고 거리를 활보하면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봤다. 축구용 정강이 보호대를 무릎 아래에 대고, 미군 피엑스(PX)에서 어찌어찌 흘러나온 다른 운동용 신체 보호대로 간신히 구색을 맞추긴 했지만 부끄러울 것 없는 청춘이었다. 겨울이 되면 꽁꽁 언 경복궁 경회루 연못이나 청량리 미나리꽝에서 연습을 하고 경기는 창경궁 춘당지(春塘池)나 제2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자리) 등지에서 했다.

여름에는 농구였다. 오전 4시부터 운동장에서 땀을 흘렸다. 경기가 며칠 남지 않을 때면 으레 점심시간 뒤 농구부 선배가 교실로 찾아와서는 “김성수 나와!” 하고 불러냈다. 그는 부러워하는 반 아이들의 시선 속에 으스대며 나갔다. 대회에서 우승이라도 하면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구령대 앞쪽에 도열해 박수를 받으며 으쓱했다. 공부는 안중에 없었다.

배재중 운동선수라고 하면 감히 덤빌 사람이 많지 않았다. 스스로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주위에서는 벌벌 떨던 때였다. 하지만 기골장대한 청년 김성수는 ‘폐병쟁이’가 됐다. 겨우 졸업을 한 뒤, 열이 오르고 땀이 삐질삐질 나는 몸으로 아이스하키부가 있는 연세대를 찾았다. 후보 선수로 붙여준다던 학교 측은 “너를 받으면 건강한 선수를 받지 못한다”며 퇴짜를 놓았다. 역시 아이스하키부가 있는 고려대의 농학과 시험을 봤지만 면접에서 “벼를 몇 월에 심느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 떨어졌다.

“정말 한심한 거야. 괜히 운동한답시고 (대학에서) 운동선수로 불러주겠지 하는 막연한 꿈만 꾼 거지.”

약이라야 마이신(스트렙토마이신)이 전부였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할 무렵 의사는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게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고 했다. 달리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서울이 북한군 손에 넘어가고 수복(收復)될 때까지 꼼짝없이 서울 종로구 원서동 집 그의 방에서 누워 있었다. 밥 먹을 때와 용변을 볼 때가 하루 중 몸을 일으키는 전부였다. 폐병 환자가 있다는 소문은 온 동네에 퍼졌고, 의용군에 끌고 가기 위해 청년들을 찾아다니던 북한 병사들도 그의 집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다들 죽는다, 죽는다 했으니까 죽는 줄 알았지. 주는 대로 먹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사는 날까지 조용히 살다 가자고 했지. 후회스럽지요.”

부모님이 어렵게 구해 주신 마이신 주사가 너무 맞기 싫어서 주사를 놓는 순간 엉덩이에 힘을 주면 그 비싼 마이신 주삿바늘이 툭 튕겨났다. 그런 바보가 없었다. 그 주사를 7년여 더 맞아야 했고, 쓰디쓴 약을 9년 더 먹어야 했다. 휴전 직후 “이제는 대학을 나와야 하는 시대가 됐다”며 어머니가 수를 써 단국대 정치학과에 입학시켰지만 다니는 둥 마는 둥 졸업만 했다. 허송세월이었다.

거듭나다

그렇지만 아이들과는 정말 재미있게 지냈다. 병세가 상당히 호전된 1950년대 후반 김성수는 아버지가 주주로 있던 한 회사의 수원지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믿어온 성공회 집안인 덕에 성공회 수원교회 내 보육원에 있던 한옥에서 숙식할 수 있었다. 평일엔 회사를 다니고 토 일요일에는 보육원 아이들과 같이 놀았다. 그 광경을 2년여 지켜보던 보육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이나 간호사, 보육교사들이 “신부(神父)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고 틈나는 대로 그를 부추겼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5, 6학년생을 제치고 4학년으로 대대장(지금의 학생회장)이 되어서 칼을 차고 우쭐대며 꿈꿨던 군인도 물 건너갔고, 운동선수가 되는 바람도 사라졌다. 뭘 할지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떠오른 건 없었다. 그래도 신부라니…. ‘무슨 시험이든 첫 번에 붙어 본 경험이 없다’ ‘떨어질 게 분명하다’며 저항하다 억지로 시험이나 보기로 했다. 그런데 현 성공회대 전신(前身)인 성(聖) 미카엘 신학원에 덜컥 붙어버렸다. “와∼, 어처구니도 없고…. 나도 단번에 합격하는 경우도 있구나, 싶었죠.” 그래도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불러줬다고, 이것이 자신의 소명(召命)이라고 100% 확신하지는 못했다.

성 미카엘 신학원 원장은 대천덕(戴天德·미국명 루벤 아처 토리 3세·1918∼2002) 신부였다. ‘노동은 기도요, 기도는 노동’이라고 강조하던 대 신부는 “농토가 많은 한국에서 사는 걸 배워야 한다”며 신학원생들이 밭일을 하도록 했다. 농사철에는 수업을 마친 오후 2시 반부터 5시까지 어김없이 밭으로 나가 배추며 무를 가꿨다. 포도와 수박을 길러 외국인들이 모여 살던 남산 기슭에 싣고 가서 팔기도 했다. ‘신학공부 하러 왔지, 밭일하고 장사 배우러 왔나’ 하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대 신부는 키우던 돼지를 잡아 내장으로 소시지를 만들고 살은 훈제(燻製)해 팔려고 했으나, 보릿고개를 넘겨야 할 배고픈 젊은 신학생들이 야금야금 다 먹어치우고 말았다.

늦깎이 신학생 김성수는 예배 시간에도 회당 맨 뒷자리에서 동료들과 잡담하는 걸 즐겼다. 1년이 지났을 무렵 대 신부는 “신학공부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이제 실컷 놀았으니 그만 나가라는 소리로 들렸다. “아닙니다. 저는 공부해서 신부가 되겠습니다”라며 버텼다. 희한하게도 “기도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동료들은 대부분 성직(聖職)에 들어서지 못했다. 그 대신 폐병을 앓지 않았다면 괜히 일확천금이나 노리다가 패가망신했을 ‘우스운’ 청년이 신부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신학원 3, 4년 동안 하느님이 저를 부르셨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다만 신부가 된다면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굳어졌지.”

‘못난이’ 주교

김성수의 그 결심은 이후 계속 지켜졌다. 사회의 약자 편에, 지적장애인 곁에, 불의(不義)에 맞서는 쪽에 항상 발 디뎌 왔다. 아버지가 물려준 인천 강화군 남쪽 땅에 2000년 지적장애인 직업재활시설 ‘강화도 우리 마을’을 만들고 지금까지 ‘촌장’으로 있다.

20∼50대의 ‘아이 같은’ 지적장애인 50여 명이 함께 살며 일한다. 그는 58세가 되면 우리 마을을 나가야 할 이들이 머물 양로원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성직을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좀 부끄럽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불쌍한 자신을 택해 놓아주지도 않고 쓰시는 하느님께 여태 보답도 못해서 그렇단다. 아직도 하느님이 자신을 괜찮다고 여기셔서 여기 놓아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을 시험 중인지 잘 모르겠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가끔 ‘못난이’라고 부른다.

그는 성인(聖人)은 아닐 것이다. 불혹의 아들이 멋대로 직장을 옮겨 다니는 게 못마땅해 3년 전부터 말도 안 한다는 걸 보면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지. 이 못난이 주교와 함께 있는 내내 기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강화=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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