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희생하고 이웃 챙기는 도시 그립다”
이기인 대한노인회 인천시연합회장은 14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혼자 있으면 책을 읽고, 둘이 있으면 우정을 나누고, 셋이 있으면 합창을 하는 아름다운 인천을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선홍 기자 sunhong@donga.com
광복을 1년 앞둔 17세 때의 일이다. 일제의 검찰에서 일했던 동네 친구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모아놓은 책자(조서)를 입수했다. 이를 독해하려고 7, 8명이 모였다. 혈기왕성했던 그들에게 이 책은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찍 경찰에 발각됐다. 새벽에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죄명은 ‘인천기계폭탄 사건’(현재 인천 동산중학교에 위치한 다이너마이트 창고를 습격하여 폭탄을 탈취해서 인천 숭의동 전동에 있는 발전소를 파괴함으로써 인천을 암흑화해 항일투쟁의 불씨를 일으키려 했던 사건) 획책 기도 혐의였다.
“물고문 등 고초를 당하고 서울 서대문형무소 소년감방에 미결수 상태로 들어갔지요. 황국신민으로 살라는 회유를 하더군요. 지금도 저를 연행했던 한국인 형사, 일본 판검사의 이름을 줄줄이 외웁니다. 젊은 날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때 민족의식이 생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애국청년단체에서 일하다 당시 이승만 정부가 장려한 염전사업에 뛰어들었다. 1000m가 넘는 제방을 쌓고 사업을 벌였지만 7차례나 둑이 무너지는 등 고생을 했다. 자리를 잡아 사업이 번창하자 그는 사회봉사에 눈을 돌렸다. 국제로터리클럽에 가입해 총무 총재를 역임했고 지용택 선생과 의기투합해 당시 국내에서는 드문 시민의 자발적 문화단체인 새얼재단 창립에도 일조한다. 45년간 부성염전을 하다가 인천대교가 세워지면서 사업을 접었다. 보상금을 받자 2007년 인천로터리클럽과 새얼재단에 각각 1억 원씩 기부했다. 그 외 문화단체 적십자사 등에 수차례 수천만 원씩 내놓는 ‘키 작은 아저씨’가 됐다. 그는 새얼문화재단 고문직을 맡고 있다.
1994년 67세에 인천노인회 부회장이 되면서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부회장에 2차례, 회장에 4차례 피선돼 임기가 끝나는 2014년이면 노인회 활동이 20년이 된다. 무엇이 그를 기부와 봉사의 인생을 살게 했을까. “논어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하라. 남을 위할 때 정성을 다하였던가, 벗들과 신의를 다하였던가,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지는 않았던가’라고 하지요. 자기 위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이타(利他)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약속과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노인회 사업을 물었다 “노인회는 노인들의 여가선용을 위한 모임입니다. 노인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손에게 존경만 바라지 말고 봉사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지요. 또 소비하는 노인이 아니라 생산하는 노인으로 사회를 책임지는 노인이 되자는 것이지요.” 그가 강조한 ‘누구라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이따가 할 일은 지금 하자, 같은 일이라면 좀 더 잘하자’는 말은 인천노인회의 3대 지표가 됐다.
“옛날 인천은 정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정감이 사라지고 자기 이익만 챙깁니다. 후배들을 보듬어 안고 싶은데 피하는 것 같아요.”
박선홍 기자 su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