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19세기 말∼20세기 초)’,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 민화 속의 물상들은 모두 다 즐거움에 휩싸여 있고, 그들에게서 위엄이나 권위는 찾아볼 길이 없다. 봉황에 대한 서민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상상 속의 동물, 봉황
봉황은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용처럼 여러 동물의 조합으로 이뤄졌다. 문헌마다 봉황의 생김새에 대한 기록이 약간씩 다르지만 대략의 모습은 추정할 수 있다.
중국 후한시대의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앞모습은 기러기, 뒷모습은 기린이고, 이마를 보면 원앙이며, 용의 무늬에 거북의 등이고, 제비의 턱에 닭의 부리 모양이며, 오색(五色)을 갖추었다’고 기록돼 있다. 유가의 경전 중 하나인 ‘이아(爾雅)’ 가운데 서진(西晋)의 곽박(郭璞)이 단 주를 보면 ‘봉황은 닭 머리, 제비 턱, 뱀 목, 거북 등, 물고기 꼬리의 모양이고, 오채색에 높이가 6척이 넘는다’고 묘사돼 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봉황의 모양은 한결같지 않지만 닭 이미지(특히 머리 부분)가 근간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봉황과 닭을 혼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MB정부가 들어서면서 권위주의를 극복한다는 이유로 대통령 문장(紋章)에서 봉황을 없앴다. 오랫동안 9시 뉴스 속에서 친숙했던 대통령의 봉황 문장이 화면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훌륭한 임금이 통치를 잘해 세상이 태평할 때 출현했던 동물이 봉황이다. 봉황은 용과 더불어 통치자를 상징한다. 하지만 실제 쓰임에 있어서는 왕후나 신하처럼 낮은 등급의 문양으로도 사용돼 대통령 문장으론 적절치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봉황이 우는 소리는 퉁소를 부는 소리와 같고, 살아있는 풀과 벌레를 먹지 않으며, 그물에 걸리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으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醴泉·세상이 태평할 때 단물이 솟는다고 하는 샘)과 같이 좋은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으며, 날아갈 때 뭇 새들이 뒤따른다고 한다. 새들의 우두머리인 봉황은 고고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봉황의 모습은 고고함은 물론이고 화려하고 세련된 자태를 자랑한다. 19세기 궁중 화원으로 활동했던 조정규(1791∼?)의 ‘봉황’(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 대표적이다. 그림 속 봉황은 닭 모양의 머리에 긴 볏을 스카프처럼 휘날리고 몸의 깃털은 아홉 빛깔은 아니지만 색색이 물들어 있으며, 공작처럼 긴 꼬리를 찬란하게 펼치고 있다. 바위 위에서 가는 다리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는 통치자의 여유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봉황(조정규,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 후기 궁중 화원이었던 조정규의 봉황도는 고고한 자태와 화려한 위용이 돋보인다(왼쪽). ‘염자도(19세기)’, 선문대박물관 소장. 글자를 형상화한 문자도에서는 봉황이 고고한 기대를 의미하는 ‘염’자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낱 ‘군계일학’ 정도의 존재로
그러나 민화 작가들이 그린 봉황그림 중에는 이처럼 고고하고 화려하고 세련된 자태보다는 마당에 키우는 닭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민화에서는 김선달의 일화처럼 닭과 봉황의 차이를 크게 두지 않았다. 구태여 봉황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군계일학(群鷄一鶴)’정도의 존재일 뿐이다.
민화 작가는 어려운 동물의 조합에 따르지 않고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닭의 모습에 약간 변형을 가하여 봉황을 나타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봉황’은 기본적으로 닭의 모습에 목만 길게 뽑아 놓은 모습이다. 구불구불한 형상의 매화 가지 위에는 닭 한 마리가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깃들고 있어 봉황과 닭의 연관을 암시한다. 더욱이 여기서 봉황은 더는 고고하지 않다. 흥겨움과 율동으로 가득 차 있다. 순 임금의 음악이 아홉 번 연주되자 봉황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하지만, 이 그림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넘어섰다. 봉황들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웨이브 춤을 추듯 격렬하게 목을 교차한다. 하긴, 닭이면 어떻고 봉황이면 어떠한가. 봉황의 존재를 ‘목이 긴 닭’ 정도로 인식했다는 것이 바로 봉황을 바라보는 서민들의 눈높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