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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joy]태백산 눈꽃 트레킹

입력 | 2012-01-06 03:00:00

나무에 핀 얼음꽃 헤치며 보드득 눈 밟는 소리 좋구나




태백산은 한 해 두 번 꽃 천지가 된다. 6월 초엔 붉은 철쭉꽃이 흐드러지고, 겨울엔 온통 눈꽃 세상이다. 요즘 태백산 잔등엔 상고대가 다발로 피었다. 천년 푸른 주목에 하얀 얼음꽃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키 작은 철쭉가지에도 수정 꼬마전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상고대는 나무서리이다. 나뭇가지의 물방울이 얼어붙은 ‘눈물 꽃’이다. 벌거벗은 겨울나무의 전신사리이다. 태백산 장군봉 기슭 주독 군락지에 펼쳐진 눈꽃세상. 고시목에도 눈꽃망울이 맺혀혔다. 태백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태백산에 고시랑고시랑 눈이 내린다. 눈은 이미 수북이 쌓였다. 사위는 쥐죽은 듯 적막하다. “뽀드득 뽀득!” 눈 밟는 소리만 빡∼빡! 밀린다. 귓속의 공기가 팽팽해진다. “두둑 두두둑!” 문득 간밤에 얼었던 눈 허리 밟는 소리. 뭉툭하다. 발바닥이 푹 꺼진다.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종아리와 발목이 목도리를 두른 듯 아늑하다.

태백산은 편안하다. 낙동강과 한강의 고향. 크고 작은 온갖 산들의 머리. 살집 두툼한 육산(肉山)이다. 굵은 뼈는 살집에 숨어 있다.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후덕하다. 높되 험하지 않고, 웅장하면서도 그 품이 아늑하다. 역시 ‘큰 밝음의 산’답다. 조선시대 화가 이인상(1710∼1760)은 1735년 겨울, 사흘 동안 눈 쌓인 태백산에 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백산은 작은 흙이 쌓여 크게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차차 높아져서 100리에 이른다. 결코 그 공덕을 드러내지 않으니, 마치 대인의 덕을 지닌 것과 같다.”

태백산 눈 축제, 이달 27일부터 내달 5일까지 태백산은 역시 겨울 눈꽃이 으뜸이다. 1994년부터 해마다 1월이면 눈 축제가 열린다. 2012년 임진년 흑룡의 해 눈 축제는 1월 27일(금)부터 2월 5일(일)까지 태백산 일대에서 펼쳐진다. 국제눈조각전시회, 눈사람페스티벌, 눈으로 만든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눈밭미니축구대회, 앉은뱅이썰매대회, 오리 궁둥이 닮은 오궁썰매대회, 외발썰매대회, 개썰매대회, 태백산눈꽃등산대회…. 눈 속에 파묻혀 어린아이 마음으로 한바탕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스트레스가 사르르 사라진다. 숙박 등은 예약이 필수.

겨울 태백산은 눈 밟는 재미로 오른다. “싸르륵 사그락” 방금 내린 싸락눈 밟는 소리, “보드득! 보드득” 행여 미끄러질까 봐 조심조심 밟는 소리, 마치 곰삭은 홍어 뼈, 잇몸으로 씹는 것 같다. “저벅 부드득!” 발뒤꿈치부터 즈려 밟는 소리, “퍼벅! 퍼버벅!” 아이들이 종종걸음 치며 밟는 소리, “저벅! 절푸덕!” 내려갈 때 내디디며 밟는 소리, 발바닥 가운데에 은근히 부풀어 오는, 물렁한 촉감이 쏠쏠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 밟는 방식이 다르다. 여성들은 보통 나긋나긋 밟는다. 살몃살몃 지그시 밟는다. 살금살금 어르듯이 밟는다. 남자들은 퉁퉁 몸을 실어 밟는다. 다리를 쭉쭉 뻗어 퍽퍽 내디뎌버린다. 그러다 한순간 아이쿠! 넉장거리로 나뒹군다.

아이젠과 스틱은 필수장비이다. 신발 속으로 파고드는 눈과 정강이의 찬 기운을 막아주는 스패츠도 물론이다. 신발은 발목 끈을 다시 한번 꽉 조여야 한다. 눈길은 조금씩 밀리는 맛으로 걸어야 맛있다.

겨울 태백산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그만큼 완만하고 코스도 짧다. 사길령매표소, 유일사매표소, 백단사매표소, 당골광장 어느 코스나 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오르는 데 2∼3시간, 내려오는 데 1∼2시간. 대부분 산은 7푼 능선 위쪽으로는 가파르다. 하지만 태백산은 8푼 능선 위쪽이 평평한 언덕 즉 평전(平田)이다. 영락없는 암소 잔등이다. 그곳의 5, 6월은 철쭉꽃이 장관이다. 겨울엔 눈꽃이 황홀하다. 8푼 능선까지 오르는 데에도 ‘깔딱고개’ 같은 것은 없다. 완만하다. 더구나 출발지점이 이미 해발 850m가 넘는다(유일사 주차장 850m). 꼭대기 장군봉 1567m까지 반쯤 거저먹고 오르는 셈이다.

겨울나무에 눈꽃이 활짝 피었다. 중턱까진 낙우송 졸참나무 물박달나무 고로쇠나무 생강나무가 온몸에 눈꽃을 매달고 있다. 층층나무 가래나무 물푸레나무가 앙증스러운 눈꽃을 다발로 피우고 있다. 그러다가 한순간, 눈꽃 덩어리가 스르르 통째로 떨어진다. 계속 내리는 눈의 무게에 속절없이 지고 만다. 모가지가 툭 꺾이는 동백꽃 같다.

역시 눈꽃의 으뜸은 상고대(Air Hoar)이다. 꼭대기 부근의 철쭉 분비나무 주목 잣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하나같이 눈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다. 상고대는 나무서리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얼어붙은 ‘얼음꽃’이다. 겨울나무의 사리 ‘눈물꽃’이다. 한 줄기 겨울햇살에도 반짝반짝 빛난다.

태백산 평전마다 키 작은 철쭉무리 가지에 얼음 꼬마전구가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억새 쑥대머리에도 하얀 얼음꽃이 피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나무에도 주렁주렁 매달려 수정처럼 빛난다. 영락없는 크리스마스트리다. 금방이라도 깜박깜박거릴 것 같다.

나뭇가지들은 겨우내 상고대를 피우며 ‘얼었다 녹았다’를 되풀이한다. 살은 얼고 피부는 트다 못해 얼어터진다. 그래도 얼음꽃을 피우고 또 피운다. 강원 대관령 덕장의 황태들처럼 얼음구덩이에서 산다. 나무는 그렇게 얼음꽃을 수없이 피운 뒤에야, 비로소 새봄 황홀한 꽃을 피워 올린다.

태백산 보호주목은 모두 3928그루이다. 설악산 덕유산 소백산 주목보다 잘생겼다. 키도 크고 붉은 근육질 몸매가 탄탄하다. 붉은 열매, 붉은 껍질에 늘 푸른 뾰족 바늘잎. 그 사이로 주렁주렁 피운 하얀 얼음꽃.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그리고 땅바닥에 장렬히 쓰러져서 천년. 얼음꽃을 무려 삼천 년 동안 피운다.

태백산 천제단은 새해 1월 해돋이 으뜸 명소이다. 인터넷여행 숙박사이트 인터파크투어 조사에 따르면 2012 임진년 흑룡의 해 해돋이 예약건수는 태백산 천제단이 23.4%로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는 포항 호미곶 16.9%, 해남 땅끝 13%. 그렇다. 꼿꼿하게 서 있는 얼음꽃 주목나무. 그 뒤로 첩첩이 웅크리고 있는 겨울태백의 장엄한 어깨뼈. 용처럼 꿈틀거리는 추사체. 윙윙 불어대는 맵싸한 칼바람. 푸른 동해바다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해. 천제단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붉은 햇덩이.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새벽 서너 시쯤 오르기 시작해 일출직전 장군봉이나 천제단에 이르면 된다. 삼대(三代)가 덕을 쌓아야 태백산 해돋이를 볼 수 있다던가. 날씨가 좋고 나쁜 것은 하늘의 뜻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