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뿌리깊은 나무’ 시청자 사로잡아… ‘소통과 논의 시스템’은 옳은 정치의 기본
《흥미로운 일이다. 시청률 20%를 넘나들며 인기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와 ‘젊은 유권자들의 분노’로 요약할 수 있는 최근의 정치 상황이 기묘할 만큼 닮았다. 이 드라마 작가진이 ‘선덕여왕’ 같은 전작에서 이런 구도를 명확한 대립선으로 풀어낸 바 있다는 점은 더욱 그렇다. 사극이라는 외형을 입었을 뿐,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 드라마’가 시청자를 사로잡은 이유가 한국의 정치 현실에 던지는 함의는 과연 무엇일까. <편집자 주>》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왼쪽)과 태종.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집현전을 세워 경전을 배우고 익히겠노라는 세종의 말에 이방원은 이렇게 생각했다. 제왕의 패도여야만 건국 초기의 나라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는 이방원에게 “저는 제 식대로 모든 방진을 풀어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세종의 계획은 원대하지도, 기발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방원 사후 장성한 세종의 시대에 기득권을 지닌 관료들은 이렇게 말한다.
칼과 힘의 논리에 익숙한 개국공신에게서 책을 벗 삼는 서생들에게로 권력이 옮겨진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력 이동이 아니라, 권력을 만드는 시스템의 변화다. 논의의 장이 없다면 논리적 우위는 무의미한 공자님 말씀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종의 경연은 다르다. 대신들은 고사를 들어 부민고소금지법을 지키고자 하지만, 세종과 학사들은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한다면 어떻게 백성 뜻이 왕에게 전달돼 통치가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다. 법령 안에 모순을 담은 부민고소금지법은 그렇게 좌초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과정은 아니다. 단지 상식적인 논의다. 그게 중요하다.
폭력적 기득권에서 상식의 시대로. ‘뿌리깊은 나무’를 비롯한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드라마가 방송 때마다 현실 정치의 동시대적 욕구를 환기시킨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가 명확한 사극 시대를 배경으로 두 작가는 과연 그 뚜렷한 계급적 구도 안에서 어떻게 합리적 치국(治國)이 가능할지를 고민해왔다. 인조 시대를 배경으로 추악한 권력에 맞서는 소시민적 영웅 이야기를 그린 KBS 드라마 ‘최강칠우’가 그랬고, 미실의 엘리트적 정치사상에 맞서 백성과 함께하는 세상을 말한 MBC 드라마 ‘선덕여왕’이 그랬으며, 무의 시대에서 문의 시대로 조선을 재편하는 ‘뿌리깊은 나무’가 또 그렇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간단치 않은 질문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하루 앞둔 10월 25일 오후 강남역 부근 유세장에 있는 시민들.
하지만 그렇게 지켜야 할 국가란 과연 무엇일까. 신라라는 국호인가, 왕궁인가. 덕만(선덕여왕)이 이에 반박하는 이유는 미실의 진심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국가는 백성이라고 생각해서다. 과연 이 풍경은 낯선 것인가.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기간에 정부는 국격을 거론하며 음식물 쓰레기 배출 자제를 요청했다. 여기서 국격의 주체인 국가는 누구인가. 다른 나라 정상이 볼 서울의 모습이 걱정되는 대통령인가. 그럼 당장 생활의 불편을 느껴야 하는 시민은 국가로부터 배제된 존재인가.
물론 모든 숫자를 배열해도 전체적인 균형이 깨지지 않아야 하는 ‘뿌리깊은 나무’ 속 마방진의 어려움처럼, 모든 백성의 요구를 치국 안에 조화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방원은 방진에서 모든 숫자를 떼어내고 가운데 왕을 상징하는 1만을 넣어 방진을 완성하고자 한다. 이는 앞서 본 미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성향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드라마 ‘선덕여왕’과 ‘뿌리깊은 나무’의 김영현(왼쪽), 박상연 작가.
현실의 특정 세대가, 혹은 드라마 속 집현전 학사가 언제나 옳은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통치를 위해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을 사용하며, 자신의 최초 신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스템만 온전히 기능할 수 있다면, 그들의 변해버린 태도와 언행의 모순을 비판할 수 있는 논의의 장만 유지된다면, 흔들리는 걸음 속에서도 정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박상연 작가는 덧붙였다. “그 절망적인 세계관에서 대단히 낙관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본 게 아니라 작은 희망, 그걸 본 것이다.” 그 희망의 얼굴을 지금 우리도 현실에서 보고 있는가.
위근우 텐아시아 기자 eight@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