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들/정한용 지음/152쪽·8000원·민음사
그의 시는 쉽게 읽혔지만 무척 불편했다. 눈살이 찌푸려졌고 몇몇 대목에선 구역질도 났다. 모조리 우리 같은 사람이 자행한 일이라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졌다.
정한용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유령들’은 이처럼 전쟁과 테러, 노예사냥, 인종·민족 차별, 정치적·종교적 분쟁에 뒤따랐던 제노사이드(genocide·특정 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노예로 팔려가는 흑인, 킬링필드로 아버지를 잃은 캄보디아 소년, 서방의 침략을 받은 이라크 아낙네 등의 입을 빌려 섬뜩한 현장을 고발한다.
아마 대다수 독자는 ‘내게 또는 내 주변인들에게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6·25전쟁 때 결혼 3개월 만에 남편을 잃은 기자의 할머니는 지금도 총 쏘는 장면이 담긴 전쟁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몇 년 전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 주한미군이 이라크로 전출된 후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시인은 “죄 없이 죽었고 ‘불편한 진실’이란 이유로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잊혀진 ‘유령들’을 대변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집은 함부로 교훈을 강요하거나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여기 있다”며 울부짖는 그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