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사회부 차장
국가와 민족, 이해관계와 상황을 떠나 자기 일에 진심을 다하려는 공복(公僕)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일본인인 그가 조선 문화재에 특별한 애착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조선총독도 문화재를 반출하던 시대에 도난으로 책임을 졌을 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던 한 시골 공무원이 어떤 상황과 관계없이 진심을 다해 일하려 했다면 그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이 문제는 정치인들의 필요로 시작됐다. ‘사법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논쟁은 의원 후원금 모금에 제동을 건 검찰을 손보기 위해 시작된 면이 강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이 수사권 조정 문제였다. 시작이 그랬더라도 국민의 공복이라면 “우리가 가져야 한다”고 싸우기보다 “우리가 가지면 이렇게 잘할 수 있다”고 말해야 했다. “저들이 가지면 문제가 생긴다”고 하기 전에 “우리가 이렇게 잘해 왔다”고 밝혀야 했다. 최소한 “중요한 권한을 가지려 하는 만큼 앞으로 이런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공박이 커지면서 국회는 손을 놨고, 총리실의 중재는 실패했다. 급기야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나서서 “타결이 안 되면 (이 방을) 못 나간다”고 으름장을 놔 일단락됐지만 이해득실 때문에 또 시끄럽다.
한 번쯤은 그들이 처음 제복을 입고, 고시에 합격했을 때 마음을 되돌아봤으면 좋겠다. 그때는 ‘불의에 맞서 거악(巨惡)을 척결하고, 약자를 부축해 일으키고, 굽은 것을 펴는’ 마음을 다짐했을 것이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논쟁은 얼마나 초라한가. ‘공복’이 이해관계를 떠나 자기 일에 충실하다면 그것이 국민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을 리 없다. 국민의 이익을 먼저 말할 수 없는 ‘소유권’ 논쟁이라면 밥그릇 싸움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국회의원의 꿈이 고작 배지를 갖는 것일 수는 없다. 시인이 장식용으로 펜을 사는 것이 아니듯 공복이라면 자신의 권한을 다투기보다 어떻게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먼저다. 또 가진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제대로 사용해 왔는지 자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진구 사회부 차장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