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 온양의 부잣집 딸이었던 김 대장은 학창 시절 친구의 부모가 운영하던 보육원에서 만난 6·25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면서 봉사의 삶을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오랫동안 보육원에서 일했다. 어느 날 시각장애인이 혼자 길을 걷다 개천에 빠진 모습을 보고 장애인들의 삶 속으로 다가갔다. 1987년 10월 몇몇 자원봉사자와 함께 중증(重症)장애인을 돕기 위한 ‘부름의 전화’를 만들었다. 지금과 같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장애인 활동보조인 서비스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부름의 전화 사람들은 23년 동안 1급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눈과 손발이 돼 주었다. 자원봉사자 400여 명의 올해 ‘파송(派送) 건수’는 1300여 회에 이른다. 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김 대장과 조성숙 간사(55)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은 연간 15∼20회의 답사활동도 벌였다. 봉사자들은 자기 돈과 시간을 쓰고 차량까지 제공한다.
봉사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 이념, 종교에 관한 대화는 금물이다. 어떤 명분으로든 단체 차원에서 시위나 집회에 참가한 적도 없다. 개인적 견해는 다르더라도 사회봉사단체는 그 취지에 맞게 순수한 봉사활동에 그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자리 잡았다.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이나 단체들이 돈과 정치에 오염된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낮은 목소리와 조용한 발걸음으로 장애인, 부모 없는 어린이, 무의탁 노인 같은 약자들을 보살피는 선한 이들이 적지 않다. 성직자의 옷을 벗고 정치판이나 카지노판에 뛰어드는 게 더 어울릴 듯한 속류(俗流) 종교인도 있지만, 영혼의 평화와 감동을 전하며 묵묵히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성직자와 신자가 더 많다. 소외계층에 매일 도시락 450개를 전달해온 전북 정읍종합사회복지관 박영미 조리사, 아프가니스탄 봉사 도중 A형 간염에 걸려 숨져가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던 신민정 씨 같은 의인(義人)도 있다.
기쁨과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과 고통은 나눌수록 줄어든다고 했다. 부름의 전화에서 활동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세속의 때에 찌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흘밖에 남지 않은 2010년을 뒤로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켜주고 살맛나게 하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