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10년간 납북자 문제 외면… 죽기전 아버지 소식 들을수 있길”
이태영 6·25납북인사가족회 이사가 1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 이사의 부친인 이길용 씨는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으로 6·25전쟁 중납북됐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이태영 6·25납북인사가족회 이사(69)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의 부친은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으로 6·25전쟁 중 납북된 이길용 전 동아일보 기자이다.
6·25전쟁 중 납북자는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은 13일 ‘6·25전쟁 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비로소 시작됐다.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의 납북자가 고인이 됐거나 종적을 찾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는 “현 정부의 노력에 감사하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고 토로했다.
북측이 이 전 기자를 서대문형무소에 임시 수감했던 것은 확인됐지만 그 이후의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평양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한 황신덕 중앙여중고 창립자(작고)에게서 “서대문형무소에서 북측으로 떠날 때는 같이 있었는데 평양에 도착해 보니 안 보이더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이 이사의 가족들도 전쟁 중에 고초를 겪었다. 당시 애국부인회 지부장을 맡고 있던 어머니는 남편이 납치되고 얼마 뒤 북한군에 끌려갔다. 하지만 “6명의 어린 자식들만 남아 집안이 풍비박산 나게 됐다”고 통사정을 해 겨우 풀려났다. 중학교 5학년(현재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큰형도 좌익 청년들에게 고문을 당해 오랫동안 후유증을 앓았다.
이 이사는 “아버지가 납북된 뒤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던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지만 가장을 잃은 정신적 충격이 더욱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동아일보에 같이 계셨던 분들을 비롯한 언론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을 수 있었고 무사히 학업도 마쳤다”고 회고했다. 이 이사는 1961년 경향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에서 체육기자로 일하면서 아버지의 유업을 이었다.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기자 재직 시절 아버지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1973년 외국에서 열린 한 체육행사에서 북측 대표단을 만나 아버지의 행적을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며 “1990년 남북통일축구 행사 때 북한을 방문했던 정동성 체육부 장관에게 부탁해 아버지 소식을 알아봤지만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 이사는 “미국은 6·25 때 숨진 미군 병사들의 유해라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우리 정부는 전쟁으로 큰 피해를 본 납북자들을 위해 도대체 무슨 노력을 했느냐”고 반문했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