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로비에서 실험극장의 역대 공연 포스터들과 함께한 이한승 대표는 “실험극장이 건재할 수 있도록 소리 소문 없이 후원해준 고병헌 금비 회장 등 후원회 분들에게 특히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그러나 실험극장을 23년간 이끈 김동훈 대표가 1996년 별세하면서 이 연극계 명가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그해 신사동 전용극장 문을 닫은 실험극장은 이름과 달리 ‘극장 없는 극단’으로 전락했다. ‘영광스럽게 기억될 때 깨끗이 문을 닫자’라는 말도 나왔다. 그때 ‘십자가를 짊어진’ 인물이 나왔다. 1970년 실험극장 배우로 입단한 이한승 씨(64)다.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했다. 탤런트로 얼굴이 알려지긴 했지만 실험극장의 명맥을 이어가기엔 지명도가 떨어진다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신의와 성실로 퇴색해가던 실험극장의 명성을 되찾는 데 구심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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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3, 4편을 공연한 실험극장의 생명력은 역사가 오랜 다른 극단들과 비교할 때 더 뚜렷하다. 최고령 민간극단인 신협뿐 아니라 실험극장과 비슷한 시기에 창단됐던 가교, 자유, 광장, 민중극단 등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실험극장이 단원 중심의 동인제 극단에서 제작 중심의 프로덕션 체제로 발 빠르게 전환한 데 비해 다른 극단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5년 1월부터 작품의 제작과 운영을 대표 1명이 책임지는 대표중심제로 바꿨습니다. 말이 좋은 거지, 돈을 끌어모으는 것부터 시작해서 예술감독 역할도, 잡역부 일도 다 제 몫이 된거죠.”
알게 모르게 빚만 쌓인 무능한 가장이 됐지만 그는 대학로에서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오래 사무실을 지키는 연극인이다.
“술을 못 마셔 늦게 잠들 일은 없으니 일찍 나와서 늦게까지 연극 생각만 하고 사는 거죠. 대표직과 함께 물려받은 돈이 150만 원이었는데, 물러날 때 어떻게든 전용극장 하나는 마련해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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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배포할 ‘실험극장 50년 공연화보집’ 제작으로 여념이 없는 이 대표는 “한 번 보고 잊어버리는 연극이 아니라 가슴속에 오래 남는 연극을 계속 만들겠다”면서 “실험극장 하면 진중한 작품만 떠올리는 데 ‘휘가로의 결혼’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니 많이 찾아주시면 고맙겠다”고 했다.
대학로 코미디 페스티벌에서는 민중극단의 ‘국물 있사옵니다’, 연희단거리패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극단 골목길의 ‘처음처럼’ 등 7편의 희극이 공연된다. 02-3668-005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