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렇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무책임한 정책’의 누명(?)으로 소외당하게 됐는가. 수년간 누적된 재정과 경상수지의 쌍둥이 적자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직접적인 화근은 최근의 양적완화 정책 때문이다. 미국 경제의 재침체를 막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내년 6월까지 6000억 달러를 푼다고 했다. 만기 채권까지 감안하면 거의 9000억 달러에 이른다. 2008년 위기 이후 1조7000억 달러를 쏟아 부은 1차 양적완화에 이어 두 번째 확대정책을 실시하는 셈이다.
2차 양적완화 정책에 대한 논란은 미국에서도 뜨겁다. 오히려 FRB의 정책에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내는 전문가가 더 많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통화를 더 풀면 금리가 하락하여 대출이 늘어나고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겠지만 실제로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하거나 수출을 증가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주식과 원자재 가격만 올려놓고 신흥국에 투기 자금이 유입되어 글로벌 금융시장만 교란시킬 뿐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연유로 미국은 1 대 19의 외로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적완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고뇌도 만만치 않다. 이미 기준금리는 0%라서 더는 낮출 수 없다. 그렇다고 재정의 확대정책을 기대할 수도 없다. 올해만도 적자가 1조 달러에 육박할 뿐만 아니라 이번 선거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하지 않았는가. 수출을 늘리기도 어렵다. 경쟁력은 차치하고라도 막대한 흑자를 내는 중국이 위안화 절상에 너무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적완화로 달러 공급을 먼저 확대하면, 달러는 떨어지고 다른 통화는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여건에서 경기 침체가 예견된다면 누군들 통화의 양적완화를 주저하겠는가. 이런 이유로 대표적인 비관론자인 뉴욕대의 누리엘 루비니 교수조차 양적 확대가 필요악이라고 지적한다. 이번 조치가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제3, 4의 양적 확대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유동성의 확대는 세계 곳곳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전형적인 경기부양책이다. 문제는 달러가 미국 국민만의 통화가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기축통화라는 사실이다. 양적완화로 달러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면 금과 원자재는 물론이고 엔화처럼 다른 통화의 가치도 뛰어오른다. 행여 자국의 통화 가치를 안정시킨다고 여러 나라가 양적완화로 대응한다면 글로벌 경제는 환율전쟁으로 재앙을 면치 못한다. 지금 세계 각국이 양적완화의 딜레마에 직면한 것이다.
미국이 경기부양책을 포기하고 달러 가치의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선회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설령 양적완화를 포기하고 재정 긴축과 저축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대폭 줄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 또한 양적완화 못지않게 글로벌 경제에 큰 충격을 준다. 미국이 적자를 줄이면 흑자국에 타격을 주고, 그렇다고 적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면 달러 가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트리핀이 역설한 기축통화의 딜레마다.
기축통화 다양화 논의 고개 들어
글로벌 경제는 상당 기간 안정적인 결제수단을 모색하는 불안한 과정을 되풀이할 것이다. 때로는 금이나 원자재, 엔화 등 대체 통화에 투기가 나타나고 일시적으로 달러가 재상승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기축통화를 다른 통화로 대체하자는 합의도 쉽지 않아 보인다. 달러의 위상이 점진적으로 낮아지면서 결국은 다양한 결제수단이 등장하고 실제 결제 관행에 따라서 수십 년에 걸쳐 새로운 기축통화가 정립될 것이다. 행여 미국경제가 다시 회복된다 해도 당분간 세계는 기축통화의 딜레마에서 헤어나기 힘들 것 같다.
정갑영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