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헤르타 뮐러 지음/368쪽·1만3000원/문학동네
교사인 아디나는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 학생을 토마토 수확작업에 동원한 것은 미성년자 노동 착취라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비밀경찰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다. 여우의 사지를 하나씩 절단하는 것으로 아디나가 비밀경찰의 손아귀 안에 있음을 고지한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타 뮐러(사진)가 장편소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에서 다루는 시대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막바지다. 쇠락한 도시에서 앞날에 대해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한 채 그저 피로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사회적 실험’이라는 사회주의체제 정부가 약속했던 현실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메모지 한 장이 현관 문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아디나가 읽는다. 사람들이 체포될 거야 리스트가 있어 넌 숨어야만 해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널 찾지 못할 거야 이웃집 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계단에서 클라라의 하이힐 소리가 똑똑 울린다. 아디나는 발끝으로 메모지를 문틈에서 끌어당긴다.’
아디나가 도피하는 것은 여우의 머리가 잘리기 직전이다. 이야기는 정권 붕괴라는 혁명적 사건과 독재자의 몰락 뒤에도 변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작가가 가장 전달하고 싶었을 메시지가 응축된 묘사로 맺어진다.
이 작품은 작가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됐다. 비밀경찰로부터 스파이 역할을 제의받았던 뮐러는 제의를 거부했다가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이후 비밀경찰의 감시와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제목은 루마니아 속담에서 가져온 것으로 희생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뮐러는 서울에서 열리는 ‘2010 세계비교문학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15일 처음 방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