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심벌’ 신화 뒤에 숨은부끄러운 집단폭력 들춰내극단 여행자의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대본 ★★★★ 연출 ★★★★ 연기 ★★★☆ 무대 ★★★☆
10명의 남자배우로 먼로의 삶을 재구성한 극단 여행자의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 ‘누가 먼로를 죽였나’라는 선정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마릴린 먼로되기’를 택한 이 연극은 ‘대중의 욕망’을 그 범인으로 지목한다. 사진 제공 코르코르디움
극단 여행자의 연극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은 현대적 신화가 된 먼로의 삶을 그리스 비극의 어조로 재구성한다. 여기서의 신화란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이라는 이미지를 말한다. 잠자리에 들 때 향수 ‘샤넬 넘버 5’만 걸치는 요부, 그 덕택에 당대의 스포츠 스타(조 디마지오)와 노벨문학상 수상자(아서 밀러)를 남편으로 삼았던 행운의 여인, 그리고 당대 최고 권력자(존 F 케네디 대통령) 형제와 동시에 정분이 난 방탕한 여인….
이들 이미지가 야기하는 감정이 선망이든 비난이든, 거기엔 실체에 대한 무감각이 숨어 있다. 실체는 무엇인가.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사생아로 뒷골목에서 자란 노마 진 모텐슨, 열여섯에 팔려가듯 결혼해야 했던 가난한 누드모델, 괴테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며 진지한 연기를 꿈꿨던 여배우 지망생, 세상을 향해 SOS를 보냈지만 번번이 무시당한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중스타…. 이미지의 응집력에 비해 우리에게 남겨진 실체의 흔적은 얼마나 파편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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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으로 연출 데뷔하는 조최효정 씨는 여기에 기막힌 아이디어를 더했다. 여배우 없이 남자배우 10명으로만 무대를 채우는 것이다. 속옷 하의만 걸친 그들은 돌아가면서 때로는 금발 가발을 쓰고, 때로는 하이힐을 신고 먼로의 걸음걸이와 제스처, 표정을 과장된 방식으로 흉내 낸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 비견해 ‘마릴린 먼로 되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런 연출기법은 3가지 효과를 거둔다. 첫째, 웃음을 통해 먼로에 대한 선입견을 자연스럽게 무장해제 시킨다. 둘째, 욕망의 주체(남자)를 욕망의 대상(먼로)으로 바꿔 치는 역지사지를 통해 성적 차이를 뛰어넘는 공감의 지평을 확보한다. 셋째, 남성의 육중한 몸(욕망)에 갇힌 슬픈 여성으로서 먼로를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먼로가 20세기폭스사의 배우 오디션에 참가해 발탁되는 과정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처럼 풀어낸 점도 신선하다. 먼로는 수위, 킹콩, 여배우라는 3단계 관문을 립스틱, 바나나, 권총이란 3개의 아이템을 활용해 통과한다.
여기에 레드 카펫을 연상시키는 바닥과 영화 시사회장 출입구를 모두 빨간색으로 통일한 심플한 무대 위에서 하얀색 쿠션을 수많은 소도구로 활용한 무대 연출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한다. 전통의 현대화를 시도해온 극단 여행자를 대표하는 양정웅 연출과 또 다른 섬세한 감각으로 무장한 역량 있는 연출가를 만날 수 있는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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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만 원.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889-35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