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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옛친구가 그곳에 있었네

입력 | 2010-06-11 03:00:00

전주 한옥마을의 하룻밤




덜컹, 하고 버스가 멈춰 섰다. 꾸벅꾸벅 졸다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부신 햇살. 버스 전면에 붙어 있는 전자식 시계가 ‘이제 눈 떠!’ 하고 꾸짖는 듯 붉은빛으로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6:28’ 금요일쯤 되면 일상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금요일 오후, 전주 한옥마을에 갔다.

버스에서 내려 관광안내소에서 전주 한옥마을 지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모퉁이 가게에서 막걸리를 주고받는 아저씨들, 꼬마를 데리고 산책하는 젊은 부부,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이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저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미리 예약해둔 숙소 ‘아세헌(雅世軒)’을 찾아 나섰다. 한옥마을에서는 지도만 있으면 어디든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한옥마을 중심도로인 태조로와 은행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2층짜리 한옥 커피 가게 ‘모심’을 지나 조금 걸으니 네거리 슈퍼와 새서울 미용실이 나타났다. 한옥마을의 첫인상은 이랬다. ‘음, 서울 인사동과 비슷하긴 한데 좀 더 조용하고 소박한 것 같군.’

○ 문틈으로 가야금 선율이 흘러나오고

 

1박 2일용 간단한 짐 꾸러미조차 얼른 벗어던지고 싶어질 즈음, 아세헌이 나타났다. 삐걱…. 대문을 열었더니 작은 마당은 가야금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전주 한옥마을은 한옥 숙박과 더불어 10곳에서 다도, 전주비빔밥 만들기, 한지공예 등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아세헌은 전통음악을 체험하는 공간. 15년 판소리 경력이 있는 주인장 박윤희 씨(35)가 체험을 신청한 이들에게 가야금과 판소리를 가르쳐준다. 1인당 1만 원.

댓돌을 밟고 올라서 툇마루에 잠시 앉았다. 박 씨의 친정어머니가 안채인 목영당의 창호지 문을 열어줬다. 기름 먹인 장판, 꽃 그림 펼쳐진 병풍이 정겹다. 4인 가족이 쓰기 적당한 이 방은 1박에 8만 원이다. 1∼2인실은 하룻밤에 6만 원. 오후 2시 이후 입실, 오전 10시 퇴실이다. 방마다 샤워시설과 세면대, 양변기를 갖췄다. 심지어 40인치는 돼 보이는 LG 평면TV도 있다. 없으면 불편하다고 투덜댈 것이 뻔하면서도 ‘어울리지 않아’ 하고 괜히 고개를 저어본다.

한옥마을을 살짝 벗어나 풍남문 근처에서 전주식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어느새 깜깜한 사위. 노란색 불빛 속에 안겨 있는 한옥마을은 사뭇 포근해보였다. 동행하긴 했으나 각자 가고 싶은 대로 따로 다닌 두 사람이 각각 “밤 풍경이 더 근사하다”고 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전동성당은 훨씬 웅장하게 느껴졌다.

은행로의 실개천 길은 밤에 더욱 빛난다. 작은 조명이 붉은색, 연두색, 푸른색으로 바뀌며 557m의 실개천을 색색으로 물들인다. 실개천 옆에는 정자와 작은 연못, 물레방아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도 좋다. 선선한 밤, 좋은 사람과 손 꼭 잡고 자박자박 산책하고 싶은 길이다.

글·사진 전주=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700여채 어느 집이든 사람이 사는 살림집 그래서 더 살갑죠”


○ 문고리에는 낡은 숟가락이

자, 이제 한옥에서 하룻밤이다. 낯선 곳에서는 특히나 문단속이 필수라 여겼으나 창호지 문을 보고는 ‘대략난감’했다. 문고리에 낡은 숟가락 하나 덜렁 꽂혀 있을 뿐. 불안하기는커녕 피식 웃음이 났다. 뜨뜻한 물로 땀을 씻어내고 뽀송한 이부자리를 폈다. 피곤한데 잠이 잘 안 온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구불구불하다 챙겨온 시집을 펼쳐들었다. 이 밤, 왠지 소설보다는 시가 어울릴 것 같았다.

‘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로와요/맘에도 사무치도록 그리워와요/ 이리도 무던히 아주 얼굴조차 잊힐 듯해요.// …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하이얗게 밀어드는 봄밀물이/눈앞을 가로막고 흐느낄 뿐이야요.’(김소월의 ‘밤’)

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시곗바늘이 12시 근처에서 꼼지락대고 있다. 불을 끄고 누우니 귀가 눈을 번쩍 뜬다. 누군가 우다다 달려가는 소리, 승용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다투는 소리까지 생생히 들려왔다. 다른 숙박객이 마당에서 서성이는 소리까지도…. 탁자 위에 놓인 안내 문구가 괜한 것이 아니었구나 싶다. ‘한옥은 일반 건축물에 비하여 객실 간 방음효과가 많이 떨어집니다. 저녁 10시 이후에는 편안한 잠자리가 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역시나 아침에도 다른 숙박객들이 툇마루에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지만, 도시에서처럼 짜증이 나진 않았다. 주섬주섬 챙겨 입고 단장한 뒤 툇마루에 앉았다. 아침 공기가 달콤했다. 기와지붕과 푸른 하늘, 새 한 마리가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평온했다.

주인장 박 씨가 “일찍 일어났네요” 하면서 가야금을 들고 나왔다. 가야금 산조 한 줄기가 멍한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아, 우리 가락이 이렇게 좋았었나. 가야금 12현을 튕기는 그의 손가락을 한참 쳐다봤다. 마루 한편에는 그의 친정어머니가 마늘 껍질을 까고 있었고 다른 쪽에는 그의 딸 소정이(6)가 엎드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친한 이웃의 일상을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아, 천천히 흘러라.

아침식사로 콩나물국밥 한 그릇을 먹고 길을 나서니 은행로를 따라 거리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금∼일요일에만 열린다. 한지 부채, 도자기 휴대전화기 줄, 헝겊 인형을 비롯한 공예품부터 전통 먹을거리까지 구경하는 재미가 좋다.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프면 곳곳에 있는 전통찻집에서 오미자화채, 꽃차, 녹차 등을 맛볼 수 있다.

오목대에 서면 전주 한옥마을의 전경이 펼쳐진다. 한옥 700여 채를 바라보고 있자면, 어느 먼 옛날에 우두커니 기대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곳에서는 소박한 들꽃 향기가 피어난다. 사진 제공 전주시



○ 골목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옥마을에서는 지도 한 장 들고 골목길을 걸어야 한다. 큰길에서는 이 마을의 진짜 모습을 보기 어렵다. 인사동이나 안동 고택과는 또 다른 전주 한옥마을의 매력이 골목에 숨어 있다. 진면목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한옥마을 정기투어’를 추천한다.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오전 10시, 오후 1, 3시에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에서 출발한다.

문화관광해설사 정순자 씨가 전주 한옥마을이 생긴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전주에 몰려들어 일본 가옥을 짓기 시작했어요. 전주 유지와 학자들이 몹시 못마땅해했죠. 그래서 일본식 집 부근에 한옥을 한 채 두 채 지었답니다. 그것이 700여 채에 이르러 한옥 군락을 이뤘습니다. 이곳에 지금은 53채의 일본 가옥이 함께 남아 있지요.”

전주 한옥마을에서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는 동락원. 마당 가득 줄지어 있는 장독대가 인상적이다. 사진 제공 전주시

그의 안내로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길에 들어섰다. 대문 오른쪽에 자리 잡은 뒷간, 낡은 창살이 이방인을 반겨준다.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 씨가 머무는 승광재, 다도예절을 가르치는 설예원, 명창이 산다는 온고을소리청, 가양주 빚기 강좌가 열리는 전주 전통 술 박물관,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 문학관이 골목마다 숨어있다. 조선시대 역사를 담은 경기전과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목대, 전주향교도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한옥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한 곳도 없다. 그야말로 도심 속 생활 주거 공간이다. 정 씨는 “전주 한옥마을은 안동 고택과 달리 소박하고 수수한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또 한옥마을에는 노래방이 없고 술집도 막걸리집 딱 한 곳뿐이다.

한옥마을에서 1박 2일은 아쉬웠다. 알고 보니 다른 마을과 다른 향기가 담겨 있었다. 전주역에서 출발한 새마을호가 서울 용산역에 다다를 때쯤, 가야금으로 연주한 비틀스의 렛잇비(Let it be)가 울려퍼졌다. 한옥 툇마루에 앉아 넋 놓고 있던 시간이 아득한 꿈 같았다.

글·사진 전주=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 전주 한옥마을 이용하려면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매력적인 경험이다. 참을성 없는 현대인을 위해 TV, 샤워시설,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곳도 있지만 창호지 붙인 창문, 마당에 핀 작은 꽃이 전하는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한옥 숙박시설에서는 저마다 특색 있는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보통 1, 2인실이 1박에 5만∼6만 원대이며 4, 5인실은 10만∼12만 원 정도 받는다. 풍남헌, 동락원 등에는 성인 10명 이상 쓸 수 있는 큰 방도 있다. 문의는 전주 한옥마을 안내소(063-282-1330).

▽한옥생활체험관=공동 화장실을 써야 하는 방도 있다. 투호, 널뛰기, 고리걸기, 굴렁쇠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투숙객에게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준다.

▽아세헌=모든 방에 단독 화장실이 있다. 민요와 판소리 등 우리 소리와 가야금을 감상하고 배울 수 있다.

▽풍남헌=성인 12, 13명이 쓸 수 있는 큰 방이 있다(35만 원). 찻잎 따기, 전통차 만들기, 다도 체험을 할 수 있다.

▽동락원=전주비빔밥 만들기, 전통 예절 체험을 할 수 있다. 전체 체험관에서 무선인터넷을 쓸 수 있다.

▽설예원=한국전통생활문화교육관으로 생활예절, 다도예절 등 전통생활을 맛볼 수 있다.

▽승광재=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 씨가 머물고 있는 곳. 조선왕조의 역사를 비롯해 전통 궁중 한식과 궁중 다례를 체험할 수 있다.

▽양사재=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전주향교의 교육 공간. 전북 지역 자생차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학인당=조선 말 한국 전통 건축기술을 전승받아 지은 건물. 백범 김구 선생이 묵은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소담원=단전, 요가를 통한 명상 체험, 김부각 만들기 등을 할 수 있다.

▽부용헌=리모델링한 한옥으로 전통예절과 다도를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