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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베트남 새엄마는 천사”

입력 | 2010-06-01 03:00:00

아이 딸린 남자와 결혼… 2년전 사별… 쿠엔킴풍 씨 ‘피보다 진한 가족사랑’

피 한방울 안섞인 우리 3남매 키워주고
반신불수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양하고




쿠엔킴풍 씨가 어린이집에 다니는 막내딸 등교 준비를 하고 있다. 뒤 벽면에 그가 키우는 네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이 걸려 있다. 울주=신광영 기자

《다섯 살배기 막내딸은 더는 바나나 우유를 찾지 않았다. 밤새 고깃배를 탄 남편이 아침에 돌아오면 무릎에 드러누워 바나나 우유를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는 그렇게 아빠의 빈자리를 표현했다.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뜬 지 2년. 홀로 여섯 식구를 떠안게 된 베트남 아내는 그사이 한국말 실력이 훌쩍 늘었다. “하이고 마, 이 먼 데까지 어예 왔는교?” 지난달 26일 울산 울주군의 한 어촌에서 만난 쿠엔킴풍 씨(24)는 오후 10시를 넘겨 일을 마치고 귀가 중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네 아이가 엄마를 맞았다. 고1 큰딸, 중2 둘째 딸, 초등학교 6학년 셋째 아들, 그리고 막내 딸. 이 중 킴풍 씨가 낳은 아이는 막내뿐이다. 나머지 세 남매는 남편이 이혼한 전 부인과 낳은 아이들이다.》
“미안하구나, 우리 며느리”
“너 안붙잡는다, 새 출발하라”고 했지만…
청소일 등으로 힘겹게 일곱식구 생계 꾸려

“고마워요, 우리 엄마”
고1인 저와 9살차… 처음엔 까칠하게 대했죠
이젠 한국어 가르쳐드려요, 울산 사투리도 함께

“사랑해요, 우리 가족”
올해 처음으로 어버이날 편지-카네이션 받아
이런 착한 애들 두고 고향으로 어예 가겠는교?


킴풍 씨는 신발을 벗자마자 안방에 들어가 시아버지의 전기장판 온도를 체크했다.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인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와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킴풍 씨가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정리하고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나오자 아홉 살 차인 큰딸이 엄마를 앉히더니 어깨를 주물렀다.

2004년 한국에 올 때만 해도 킴풍 씨는 ‘인생 역전’을 꿈꿨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남편이 제 눈엔 참 듬직했어요. 친정이 가난하니까 돈도 부치고 남편과 오순도순 살고 싶었죠.”

하지만 열여덟 살 베트남 소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린 세 남매와 시부모였다. 전처가 남긴 빚까지 떠안게 된 남편은 계속되는 빚 독촉에 직장을 그만둬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시어머니와 함께 뱃일을 시작한 남편은 오전 2시에 배를 타 오전 9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오후에는 그물 정리 등 작업 준비로 바빴고 저녁을 먹으면 곧장 잠에 빠졌다. 킴풍 씨는 “말도 서툰 데다 어머니와 얘기 나눌 시간도 없어서 어머니만 보면 늘 무서웠다”고 했다. 결혼 1년 만에 낳은 막내가 투정을 부리면 시어머니는 “네 고향 아이니까 저러지, 한국 아이들은 절대 안 그런다”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킴풍 씨가 기댈 곳은 자신과 낳은 막내딸을 끔찍이 아끼던 남편뿐이었다. 남편은 아침에 녹초가 돼서 귀가해도 막내가 바나나 우유를 찾으면 벌떡 일어나 사오곤 했다.

하지만 순탄해져 가던 결혼 생활도 4년 만에 끝이 났다. 2008년 6월 남편과 시어머니를 따라 함께 뱃일 나간 날, 배 뒤편에 있던 남편이 파도에 휩쓸렸다. 남편은 허우적대며 4, 5차례 물 위를 오르내리더니 거품을 내며 가라앉았다.

남편을 잃은 상처를 다독일 겨를도 없이 킴풍 씨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스물두 살의 젊은 색시에겐 유혹이 많았다. 친정 식구들과 베트남 친구들은 “남편도 없이 한국에 과부로 남아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고향으로 돌아오든지 다른 한국 남자와 재혼을 하라”고 권유했다. 시어머니도 “살기 힘든 거 뻔히 아는데 안 붙잡는다. 비행기 값 마련해 줄 테니 원하면 언제든지 떠나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킴풍 씨는 “아빠마저 잃게 된 세 남매가 눈에 밟혔다”고 했다. “제 딸이야 친엄마라도 있잖아요. 근데 얘들은 저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아빠, 엄마가 있었으면 이렇게 안 살 텐데, 돈 없어서 시내도 못 나가고 친구들처럼 옷도 못 사 입고 하다못해 교복도….”

킴풍 씨는 교복 얘기를 꺼내다 눈물을 주룩 흘렸다. 올해 여상에 입학한 큰딸은 입학식 전날까지 20만 원가량 하는 교복을 사지 못했다. 킴풍 씨가 면사무소에 여러 차례 사정한 끝에 후원금을 받아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어렵게 한국에 남기로 결심은 했지만 홀로 짊어진 생계의 짐은 만만치 않았다. 현재 하고 있는 모텔 청소 일은 일감이 규칙적이지 않아 한 달 벌이가 30만 원 안팎. 여기에 정부 보조금 80여만 원을 보태 110만 원으로 일곱 식구가 산다. 이 중 30만 원은 당뇨와 심장질환까지 앓고 있는 시아버지 병원비로 들어간다. 지붕에서 비가 새 방바닥이 빗물로 젖지만 600만 원이 넘는 수리비를 마련할 수 없어 장마철엔 이불을 펼치지 못한다.

시어머니 최영옥 씨(63)는 “이 힘든 생활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며느리는 늘 웃는 얼굴”이라며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솔직히 내가 낳은 자식보다 며느리가 낫다”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지난해 말 친척들을 수소문해 150만 원을 빌렸다. 그 돈으로 킴풍 씨는 막내딸과 베트남 고향에 다녀왔다. 고향에 자주 연락하라고 며느리에게 매달 국제전화카드도 사준다.

킴풍 씨가 한국말을 하면 서툴다고 무시하던 세 남매도 지금은 엄마의 전담 한국어 선생이 됐다. 과거 킴풍 씨와 눈도 잘 맞추지 않았던 초등학생 아들도 배다른 여동생이 투정을 부리면 업어서 달랜다. 학교 부설 어린이집에 다니는 여동생을 위해 등하굣길마다 동생을 챙겨 손잡고 다닌다.

한번은 아버지 사망 직후 친권자로 등록되어 있는 생모가 보상금 수령 포기 각서를 쓰기 위해 집을 찾았다. 친엄마를 향해 큰딸이 쏘아붙였다.

“아줌마, 할 일 끝났으면 어서 돌아가세요. 곧 엄마 오실 텐데 아줌마랑 마주치면 기분 안 좋으실 거예요.” 자신들을 버리고 빚까지 남긴 친엄마와 그래도 곁을 지켜준 새엄마에 대한 애증이 겹친 말이었다.

지난달 8일 어버이날, 킴풍 씨는 한국 생활 6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들로부터 카네이션과 편지를 받았다.

“엄마 저희한테 잘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앞으로 잘 살아봐요.”

“수학 47점 맞아 왔을 때 학원 못 보내줘서 미안하다고 하셨죠. 죄송해요. 앞으론 열심히 해서 변호사 될게요. 그땐 꼭 효도할게요.”

킴풍 씨는 다 말라버린 카네이션을 주방 싱크대 벽에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평소 용돈 한번 제대로 준 적이 없는데 그 비싼 꽃을 어떻게 사왔을지 짐작이 가서 차마 못 버리겠어요. 이렇게 사는데 기자님이라면 고향 가고 싶겠어요?”

후원 문의 어린이재단 1588-1940

울주=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올해 5월 8일 어버이날에 고등학교 1학년생인 큰딸이 쿠엔킴풍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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