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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소통]서울대 미술관 ‘장욱진 20주기’전

입력 | 2009-12-29 03:00:00

천진한 동심을 지닌 도인의 작품처럼…

담백한 화면에 녹아든
놀라운 상상력과 해학
유화-스케치 등 140점 선봬



장욱진의 ‘밤과 노인’(1990년). 집과 나무, 까치를 남겨두고 자신이 걸어온 굽이굽이 길을 떠나 달과 함께 유유자적 떠다니는 노인. 화가는 자신의 모습을 속세를 떠나 하늘을 날아가는 도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사진 제공 서울대 미술관


우리가 꿈꿔온 때 묻지 않은 세상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인 가족. 그 집과 어우러진 나무와 새들. 모든 것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는 해와 달. 군더더기 없는 풍경에 동기간인 양 사람과 자연이 정을 나누는 세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내년 2월 7일까지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장욱진’전은 나와 가족,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자연을 순수하고 선한 시선으로 바라본 그림을 만나는 기회다. 근현대미술사에 큰 자취를 남긴 화가 장욱진(1917∼1990)의 20주기를 앞두고 마련된 전시다. 장욱진은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소재를 고유한 표현으로 녹여낸 작품세계로 알려진 화가다. 집, 가로수, 새 등 일정한 도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평면적 회화는 일상 소재를 다루면서도 탈속과 초월의 세계를 지향한다. 천진한 동심을 지닌 도인의 작품처럼.

전시는 전통과 현대를 접목하는 조형적 가능성을 모색한 화가의 초기부터 말년까지 평생 작업을 보여준다. 유화 90여 점을 비롯해 1980년대 그린 먹그림과 매직펜으로 제작한 스케치 등 총 140여 점이 ‘모색기’(1938∼1950년), ‘추상으로의 여정’(1951∼1964년), ’전통과 더불어’(1965∼1979년), ‘고독-바람이 되어’(1980∼1985년), ‘도인과 민화’(1986∼1990년) 등 다섯 섹션으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담백한 화면에 녹아든 놀라운 상상력과 은근한 해학은 속도전에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대중적 인기에 가려 학문적 접근에 소홀했던 만큼 추상작품과 스케치 등을 선보여 그를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내년 1월에 미술관과 경기 용인시 고택에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2000∼3000원. 02-880-9504

○ 길 위에 서다

검은 연미복의 신사가 황금빛 보리밭 샛길로 걸어나오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강아지 한 마리. 6·25전쟁 당시 종군 화가로 활동했던 장욱진이 1951년 그린 ‘자화상’이다.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지만 앞으로 닥칠 시간의 막막함을 상징하는 붉은 길의 초입에 선 화가는 당당하고 그림은 평화롭다. 잔혹하고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걷고 싶다는 바람을 엿볼 수 있다.

자화상이 아니라도 그는 자신을 둘러싼 생활 주변을 즐겨 그렸다. ‘나와 자연, 가족’의 개인화한 도상을 바탕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완결된 세계를 펼쳐 보인 것. 한데 실제 그림을 접하면 도판을 통해 눈에 익었던 이미지가 이렇게 작은 그림이었나 새삼 놀라게 한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품도 많은데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풍성하다. 특히 다양한 ‘가족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족을 우주의 전부처럼 생각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전시 초입에 자리 잡은 초기작 ‘소녀’. 아카데미풍 사실적 인체 표현에서 벗어나 간략화한 선으로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낸 작품이다. 1950년대 말 기하학적 화면에 형태를 단순화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 그는 1960년대 초반 추상으로의 여정에 접어든다. 앵포르멜 화풍에 영향을 받아 시도한 추상 작업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한 실험적 모색이었다. 이후 그는 다시 구상으로 돌아와 둘을 조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

○ 길 위에 다시 서다

“삶이란 초탈하는 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다 쓰고 가야겠다.”

이렇게 말한 그의 작품은 말년으로 갈수록 환상적, 관념적 성격이 짙어진다. 수염 기른 도인이 등장한다. 삶과 죽음이 경계를 허문 작업이다. 그중 말년의 자화상 ‘밤과 노인’(1990년)을 주목한다. 길의 출발점에 있던 초기 자화상과 달리 화가는 이미 지상을 떠나 하늘에 올라있다.

생전에 “나는 심플하다”는 말을 즐겨 썼던 화가. 삶도 그림도 항상 소박하고 단순한 스타일을 고집했다. 이것이 바로 격변하는 시대를 살면서도 시들지 않은 꿈과 상상력으로 한국인이 공감할 만한 작품을 남긴 원동력이었을 터다.

욕심 없는 삶이 선사하는 고독한 여유를 돌아보게 하는 전시다. 연말연시 마음이 어수선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