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나의 삶 나의 길]‘愛人敬天’ 도전 40년

입력 | 2009-11-10 03:00:00


 <55>여성 기업인 민원 해결사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 9대 회장에 취임한 장영신 회장은 취임 초기 회원의 민원을 전담하는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다. 1997년 5월 중부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여경련 회원 연수 모습. 사진 제공 애경그룹

여경련 안정될때까지 경비 부담
사랑방 만들어 여사장 고충 들어
애로사항 도와주고 경영교육도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여경련) 회장에 나서는 데 반대하는 임원을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나라는 여성경제인이 너무 불리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데 불리한 사회적 여건은 물론이고 가정 안에서도 너무 힘들어요. 남자 사장이야 회사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만, 여자 사장은 회사 일도 해야 하고 자녀도 키워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는 1인 3역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챙기면서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일을 하는 데 내가 가장 적임자예요. 요즘 우리 애경은 투자를 해야 하고 이익도 내야 해서 무척 바쁘지만 이는 내가 회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여경련 일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여성 경영인으로서 내가 해내야 할 또 하나의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애경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큰 틀에서 우리 사회에는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내 경험과 진심을 담은 얘기에 임원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우여곡절 끝에 1997년 1월 여경련 9대 회장직을 맡게 됐다. 회장이 돼 여경련을 찬찬히 살펴보니 예상보다 열악했다. 연합회 운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재정이 턱없이 부족해서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조직이 약하니 회원수가 적었고 회비도 잘 걷히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조직이 정상화될 때까지는 여경련 운영비를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내가 솔선하자 이사진이 동참했다. 실무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여성 경영인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여성 경영인의 사랑방 역할을 하도록 회의실을 개조했다. 공간이 있으면 회원이 자주 모일 수 있고,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다. 여경련 사무실 옆에 만든 회의실은 여성의 취향을 고려해서 아기자기하면서도 편히 얘기하도록 예쁘게 만들었다.

회의실을 만들기 무섭게 여사장들이 몰려들어 경영의 애로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소한 질문부터 해외 수출에 관련된 문제까지 다종다양한 민원을 쏟아냈다. 나는 여사장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친절한 의논상대가 되어주고 이를 해결해주기 위해 힘닿는 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자금만 있으면 뛰어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데 자금이 없어 공장을 못 돌리거나 원자재를 사오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내가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은행장과 연결해주고 싼 이자에 대출을 받게 하는 식이었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면 애경 계열사 사장단이나 다른 인맥을 통해서라도 어려움을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 회장이 앞장서 회원의 고충을 듣고 해결해주면서 여경련 조직은 안정돼 갔다.

하지만 여사장을 더 자세히 알고 보니 경영에 필요한 지식과 상식 그리고 경험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기초적인 경제와 경영 교육이 시급했다. 남자 사장은 전문기관에서 많은 교육 기회를 통해 최신 경영정보와 시장 트렌드를 수시로 파악하고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사장들은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해 시장의 흐름을 잘못 읽거나 그 결과 사업을 어렵게 꾸려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능률협회에 부탁해서 교육과 조찬세미나에 여성 경영인이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상공회의소는 설립 취지에 어려운 중소기업을 도와준다고 명시하고 있어 취지대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들 단체에서 여경련 회원의 교육을 주선하고 난 뒤 교육 일정을 회원에게 통보했다. 여사장들은 교육비가 비싸다면서 아예 공짜로 해달라고 했다. 조찬 세미나에 밥값도 안 내고 교육을 받겠다고 하니 나조차 당황스러웠지만 여러 단체에 다시 한 번 “모두 영세한 여성 경영인이니 무료로 참석하게 해 달라”고 염치없는 부탁을 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