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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박제된 천재’ 李箱, 핏빛 고독을 담아내다

입력 | 2009-05-07 02:56:00

연극 ‘李箱 열셋까지 세다’. 이상의 친구 구본웅을 표상한 빨강(임영준)이 이상의 연인 금홍을 이미지화한 초록(김소진·뒷모습)을 빗속에서 만나 불륜에 빠지는 과정을 스크린의 폭우효과로 극대화했다. 사진 제공 삼일로창고극장


■ 연극 ‘李箱 열셋까지 세다’

美 이미지극 거장 브루어 연출

난해한 정신세계 3色으로 표현

폭소 가득한 블랙유머로 그려

“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

한국문단에서 가장 난해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시인 이상은 자신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유작 ‘실화(失花)’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대 전위적 예술가의 아이콘이었던 자신을 시대착오적 존재로 인식한 것일까. 아니면 20세기를 살면서 19세기적 윤리에 묶여야 했던 갑갑증을 반어로 표현할 것일까. 본심이 무엇이든 미국 이미지극의 거장 리 브루어 씨의 연출로 새롭게 올라간 연극 ‘李箱 열셋까지 세다’ 속 이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예술가로 부활한다.

재미교포 성 노 씨의 영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연극은 2000년 초연 때와 바뀌었다. 초연에선 이상을 형상화한 파랑(신동력)과 그의 친구이자 화가 구본웅 내지 소설가 박태원을 모델로 한 빨강(임영준), 이상과 3년간 동거했던 금홍을 모델로 한 초록(김소진) 3명이 등장했다. 이번 공연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최후를 맞았던 실제 이상(이창수)이 등장해 동명의 극중극을 창작하는 형태로 진행한다.

실제 이상은 극 중간에 작가로 개입하고 극중 자신을 연기하는 파랑과 만나기도 한다. 그 순간 파랑은 말한다. “내가 이상일까요? 아니면 내가 이상을 닮은 어떤 인물을 연기하는 걸까요? 아니면 이상이라고 알려진 작가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어떤 인물의 역할을 하는 걸까요?”

이런 정체성의 혼돈과 자아분열은 실제 이상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다. 브루어 씨는 현실과 허구가 헛갈리는 이런 ‘이상스러운’ 구도를 놀이터 삼아 온갖 유희를 펼침으로써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이상의 정신세계를 폭소 가득한 블랙유머로 그려냈다.

1937년 도쿄가 무대라면서 정작 등장인물들은 최신형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입은 채 컵라면을 끓일 물을 놓고 말장난을 펼치는가 하면 파랑과 빨강이 바뀌어도 초록은 눈치를 못 챈다. 파랑과 빨강이 최대 70석밖에 안 되는 객석에 앉아 엄숙하게 다도 장면을 실연하는 초록을 지켜보며 수다를 떠는 장면은 포복절도할 정도다. 초록이 찻잔에 붓는 것은 다이어트 콜라다. 초록이 캔 콜라를 따는 순간 신음소리와 함께 자지러지는 두 남자를 통해 다도 또는 예술 일반에 숨겨진 성적 코드를 폭로한다.

시 ‘꽃나무’와 ‘오감도’ 같은 시 구절 외에 소설 ‘날개’의 마지막 문단이 고스란히 들어간 장면에선 풍성한 메시지를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다.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라는 유명한 ‘꽃나무’ 시구가 등장하는 장면은 하얀 스크린 영상 속에서 붉은 꽃이 피는 모습을 핏방울이 떨어져 번지는 영상으로 처리했다. 폐결핵에 걸린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이상의 핏빛 고독을 담아낸 것이다.

브루어 씨는 “이상의 머릿속 세계를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이미지의 거장답게 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절름거릴 수밖에 없는 ‘박제된 천재’의 머릿속을 시각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한없이 웃기거나 한없이 우울한 풍경이다.

좁은 소극장 무대를 확장하기 위해 무대 중앙이 수직이동하도록 한 리프트를 120% 활용한 공간 창출도 인상적이었다. 아쉬운 점은 삶이 곧 예술이었던 그의 내면풍경을 남녀문제로만 고착한 점이다. 연작시 ‘오감도’에 등장하는 13이란 숫자를 남자(1)와 여자(3)의 만남으로 해석한다거나 이상이 죽은 27이란 나이를 삼각관계를 상징하는 3의 세제곱으로 풀어낸 점 등이 그렇다. 금홍을 공유했던 이상과 구본웅의 관계에 실제 이상 집착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랴. 그 또한 이상이 쳐놓은 함정 중의 하나인 것을. 6월 28일까지 서울 중구 저동 삼일로창고극장. 4만5000원. 02-319-802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