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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참여재판 1년…배심원 평결 88%, 재판부 판결과 일치

입력 | 2008-12-24 03:00:00


배심원 95% “만족”… 국민 참여 ‘절반의 성공’

단순 살인 재판이 46%… 사건 편중 개선해야

《“직업 없이 빈둥대던 피고인은 말다툼 끝에 어머니를 칼로 찌르고 불을 지른 뒤 살해했습니다.”(검사)

“아닙니다. 수면제와 알코올 중독이었던 어머니가 약 기운 때문에 담뱃불을 끄지 않아 불이 난 것입니다.”(변호인)

23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한양석)의 심리로 22일부터 이틀째 열린 ‘어머니 살해 사건’의 국민참여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은 날카로운 신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배심원 12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번 재판은 올해 열린 59건의 국민참여재판 중 피고인이 검찰의 공소 사실 전체를 부인한 첫 사건으로, 증인만 13명이 나왔다.

재판부는 이틀에 걸쳐 18시간 넘게 진행된 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덥거나 졸리지는 않은지 수시로 확인했고, 법률용어나 심문 내용이 어려울 때마다 쉽게 풀어 설명했다.

검찰은 미리 준비한 파워포인트를 앞세워 제스처를 써가며 학생들에게 강연하듯이 쉽고 천천히 재판을 진행했다.

변호인은 평소 어머니가 아들을 각별히 아꼈고, 삶을 비관하는 태도를 보인 점 등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사안에 초점을 맞췄다.

증인으로 나온 경찰 등도 배심원들 앞에서 화재 발생 후 피고인의 행동을 배우처럼 실감나게 재연했다.

미국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배심원 재판(국민참여재판)이 국내에 도입된 지 1년. 신청률이 낮고 특정 사건에 집중됐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국민의 공감대와 참여도를 높여 최소한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는 평이 우세하다.

대법원에 따르면 이달 23일까지 223건이 접수돼 이 중 59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26일 광주지법에서 열릴 재판까지 합치면 모두 60건. 당초 예상했던 목표치(100건)보다는 낮은 실적이다.

심리가 복잡해 재판부가 배제하거나, 피고인이 유불리를 따져 접수를 철회한 건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최대법정인 서울중앙지법에서 2건밖에 진행되지 않은 점도 신청률 저조의 한 원인이다.

특정 사건에 쏠린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살인(21건)과 살인미수(8건)가 전체(59건)의 45.7%나 되고, 강도상해(17건)와 성범죄(8건), 상해치사(5) 등이 뒤를 이었다.

피고인이 자백해 형량만 정하는 간단한 사건은 29건, 유무죄를 다툰 사건은 30건으로 집계됐다.

전문 법관인 재판부와 일반인 배심원 간에 판단의 차는 얼마나 났을까. 예상외로 재판부의 판결과 배심원의 평결 결과는 전체 사건의 88.1%(52건)에서 일치했다. 불일치 사건(7건) 대부분은 배심원은 무죄 평결을, 재판부는 유죄 판결을 냈다.

재판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한 사건은 1심 판결이 난 52건 중 46건(88.5%)으로, 항소율이 높았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결론이 뒤집힌 사건은 현재까지 5건에 그쳤다.

배심원들의 재판에 대한 만족도는 비교적 높게 나왔다. 배심 재판 후 이뤄진 설문조사 결과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95.2%가 ‘만족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91.8%는 ‘심리시간 내내 집중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배심원 중 절반가량은 장시간 진행된 재판에 불편함을 토로했다. 4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루 만에 끝나면서 대부분 일과시간 이후까지 진행됐기 때문.

대법원은 “구속영장 청구 단계에서부터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홍보를 강화해 신청률을 높이고 국선변호인 및 변호사회 등과 유기적 협조관계를 구축해 피고인의 변론권 보호에 더욱 신경 쓰겠다”고 밝혔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日선 “남의 삶 재판하기 싫다”

■ 내년 5월 도입 ‘삐걱’

배심원 활동 후보 40% “사퇴하겠다”

다른사람 일 간섭 꺼리는 국민성 탓▼

일본이 미국의 배심원제도를 참고해 내년 5월부터 도입할 예정인 재판원제도가 시행도 하기 전에 위기에 몰렸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달 말 추첨을 통해 내년에 재판원으로 활동할 후보자로 선정된 사람들에게 통지서를 보내 사퇴 의사가 있으면 이달 15일까지 회신하도록 했다. 이에 통지를 받은 29만5000명 중 40%인 11만8500명이 “사퇴하겠다”는 의견을 담아 통지서를 반송했다.

일본의 재판원제도는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제나 미국의 배심원제도와 달리 재판원들이 직접 특정 형사사건의 유무죄 여부를 판단하고 양형까지 선고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재판에는 재판관 3명과 재판원 6명이 참여한다.

재판원제도에 대한 반발은 이미 변호사와 학자 등으로 구성된 ‘재판원제도는 필요 없다! 대운동’이라는 긴 이름의 시민단체에 의해서도 활발하게 진행돼 왔다. 이들은 재판원제도가 ‘법관에 의한 재판’을 규정한 헌법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일에는 재판원 후보 통지를 받은 3명이 이 단체가 주최한 행사에서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재판원제도 반대와 재판원 거부를 천명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사람은 재판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갖고 있어 재판소가 나를 재판원으로 불러도 나가지 않겠다”(회사원) “사람을 재판해 싫은 기분을 안고 저세상으로 가고 싶지 않다”(전직 교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재판원법은 재판원 후보의 이름 등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들이 실명으로 거부 기자회견까지 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 특유의 국민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들기 싫어하는 데다 송사(訟事)에 휘말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등 전반적으로 몸을 사리는 편이다. 이에 따라 내년 5월 법 시행에 들어가 7월경 재판원에 의한 재판을 처음 실시한다는 일본 정부의 로드맵이 일정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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