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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칼럼]오바마와의 가혹한 첫 外交 조우

입력 | 2008-12-23 03:07:00


아프가니스탄에 또 우리 국군을 보내야 하나. 미국 정부가 여러 경로로 파병 의사를 타진해 왔다지만 결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 보내자니 경제적 부담도 부담이지만 장병들의 안전이 걱정이고, 안 보내자니 동맹국으로서 도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해 찜찜하다.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서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너무 낮다”는 비판에도 신경이 쓰인다. 찬반(贊反) 갈등이 격화되는 것을 미리 막고 국익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몇 가지 점을 생각해보자.

우선 버락 오바마 차기 미국 대통령이 아프간 문제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취임 후 16개월 안에 이라크 주둔 미군을 철수시켜 아프간에 재배치하겠다고 밝혔다. 아프간이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거점이므로 대(對)테러전쟁의 축(軸)을 아예 그곳으로 옮기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에 대한 아프간 파병 압력이 그만큼 가중될 것임을 의미한다.

파병의 성격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유엔이 직접 주관하는 평화유지활동(PKO·Peace Keeping Operation)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PKO는 분쟁이 끝난 상태에서 분쟁 당사국들의 동의를 얻어 평화를 ‘유지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아프간 파병은 다르다. 아직도 분쟁 중이어서 평화를 ‘강제하는’ 평화강제활동(PEO·Peace Enforcement Operation)과 경제·사회 재건(再建)에 참여함으로써 평화를 ‘구축하는’ 평화구축활동(PBO·Peace Building Operation)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다. 한마디로 임무가 그만큼 복잡하다는 얘기다.

PKO에 대한 정확한 이해부터

학자들 중에는 PEO PBO에다 PMO(평화만들기·Peace Making Operation)까지 합쳐서 PKO라고 부르기도 하나 엄밀히 말하면 유엔이 직접 관장하는 ‘유엔 PKO’만이 PKO라고 할 수 있다. 고려대 이신화(국제정치) 교수는 “총칭을 써야 한다면 PKO보다 PO(평화활동·Peace Operation)가 더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PO가 있고, 그 안에서 다시 PKO PBO PEO PMO로 나눠야 현실 정합성이 있다는 것이다. 굳이 구분해보는 것은 파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졌으면 해서다. 우리는 그냥 “파병, 파병” 하지만 그게 다 같지는 않다. 성격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다. ‘파병’의 실체를 왜곡하거나 위험을 과장하지 말라는 얘기다.

어쨌거나 아프간에서의 활동이 PEO와 PBO가 결합된 것이라면 우리가 기여할 대상은 마땅히 PBO 영역이 되어야 한다. 경제·사회 재건을 지원함으로써 아프간이 정상 국가로 거듭나도록 돕는 데 초점이 모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우리 측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지원사업도 아프간 재건자금 제공, 개발원조 참여, 치안 확보를 위한 현지 경찰과 군 교육 등으로 아직까지는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파병이든 원조든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또다시 밟아서는 안 된다. 이왕 보낼 거면 우리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보내고, 보내지 않을 거면 처음부터 분명하게 ‘노’라고 해야 한다. 이라크 파병 때처럼 마지못해 보내는 모양새가 되면 상대방은 받고서도 고마운 줄을 모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파병하면 우리 군이 현지에서 좀 더 안전한 지역과 임무를 맡을 가능성도 줄어든다. 안 할 말로 생색은 안 나고 위험은 커진다.

아프간에는 미군 4만여 명을 포함해 40개국 7만5000명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지휘 아래 활동 중이다. 미국의 동맹인 우리가 더는 외면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다. 우리도 2002년 건설·의료 지원을 위해 210명 규모의 다산·동의부대를 보냈으나 한국인 집단 피랍 사건으로 2007년 모두 철수시킨 아픈 기억이 있다.

아프간 派兵, 국민적 합의 위에서

그곳에 다시 우리 군을 보내야 하는가. 결정은 결국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몫이다. 파병하지 않고서도 한미관계를 튼튼하게 유지 발전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솔직히 그런 묘책은 없어 보인다. 한미는 이미 양국 관계를 ‘21세기 글로벌 전략동맹’ 단계로 끌어올리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렇다면 경제적 부담과 안전,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오바마와의 첫 외교 조우(遭遇)치곤 너무 가혹하나 또한 피할 수 없는 승부다. 대통령이 엄혹한 안팎의 현실을 굳게 딛고 서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