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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김주영의 그림읽기]간절함에도 놀라운 에너지가 있습니다

입력 | 2008-04-19 02:58:00


소년은 벌써 10년째 문밖출입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치기 어려운 질병으로 몸져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의 노력으로는 침대조차 오르내릴 수 없을 만큼 소년의 병환은 심각합니다. 처지가 그런 소년에게도 한 가지 소원은 있었습니다. 소년이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바닷가였고, 끌어안고 싶은 것은 파도였습니다.

13년 동안 소년은 한결같이 부모 형제들에게 업히거나 안기면서 살아 왔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남을 안아보거나 업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볍게라도 업거나 안아줄 기력조차 소년에겐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백만 년 동안 역동적인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 파도를 끌어안고 같이 뒹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겪더라도 억세고 힘센 파도와 안고 업으며 부딪치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기 힘듭니다. 마치 병든 고라니가 악어와 맞서 싸우려 한다는 빈축을 살지라도 파도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소년은 그래서 바다의 사연을 담은 그림과 사진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소년의 병실 벽면은 어느새 바다에 관한 것들로 도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잠들기 전까지는 네 벽면에서 시선을 거둔 적이 없었습니다. 소년의 시선에는 파도와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소년의 부모들은 외아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닷가 마을로 이사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라는 주치의의 삼엄한 분부를 거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문득 소년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때 소년은 꿈이나 상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 상황이 바로 침대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다가 보내준 선물이 방구들을 뚫고 불쑥 솟아올라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년이 몽매에도 그리던 파도였습니다. 두 눈을 다시 닦고 보아도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파도였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잠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감전이 된 것처럼 짜릿하고 담대한 기운이 전신을 한 번 옹골차게 휘감았다가 멀어집니다. 소년은 부드럽고 힘차게 파도와 한 몸이 되어 뒹굴고, 몸부림치며 끌어안고, 억척스럽게 펄떡이며 바다 한가운데로 헤엄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10년 동안 꼼짝없이 누워만 지냈던 침대에서 소년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먼 바다에는 돌고래 한 마리가 파도와 함께 헤엄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