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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정미경]‘보통 여성’의 역사도 중요하다

입력 | 2007-11-16 03:02:00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여성사 전시관’이 있다. 2002년 여성부가 설립한 이곳은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 묻힌 여성 관련 사료를 모아 전시하고 있다. 관람객의 발길이 많이 머무는 곳은 필부(匹婦)들의 일상생활과 가사노동을 보여 주는 전시관이다.

19세기 초 시집간 딸에게도 재산이 분배됐음을 보여 주는 분재기(分財記), 1903년 김 생원 집에 보내진 사주단자, 6·25전쟁 당시 여성들이 미군에게 만들어 팔았던 손수건은 관람객이 많이 찾는 인기 코너다.

이곳 관계자는 “여성 위인들과는 달리 평범한 여성들이 어떻게 일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자료는 크게 부족하다”면서 “가정 대소사에서부터 농사까지 모든 일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여성 역사의 달’ 행사도 비슷하다.

이 행사는 1980년 여성 교사 5명이 역사 속 잊혀진 여성의 업적을 발굴해 교과서에 실리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남성이 주인공인 전쟁, 정복이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 출산, 육아, 가사노동 등 여성이 살아가는 모습도 역사의 중요한 주제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들은 미국 전역에서 다양한 여성 인물을 발굴해 교육 자료로 만들어 배포했다. 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987년 미국 의회는 매년 3월을 여성 역사의 달로 지정했다.

미국에서 보통 여성의 삶을 재조명하려는 이런 노력은 여성운동이 대중적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미국 여성운동은 여성들의 주관심사가 가족, 보육, 일자리 등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문제로 옮겨 가고 있는데도 성 평등 쟁취에 매달리다가 위기를 맞았다. 1998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페미니즘은 죽었는가’라는 커버스토리에서 “여성운동이 엘리트 의식과 자기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비판했다.

‘여성의 역사는 여성운동의 역사’라는 사고의 틀에 익숙한 국내 여성운동도 미국 여성운동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이념적 성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참여정부에서 각종 여성 관련 정부기구와 시민단체를 이끌고 있는 인사들 대부분은 여성 내부의 다양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남녀 불평등 시정에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 단체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성차별 금지, 동등임금 쟁취, 가정 내 책임공유 등이 주요 정책과제로 올라와 있는 반면 많은 여성이 더 절실하게 느끼는 취업, 육아, 근무시간 조정 문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매매특별법, 호주제 폐지 등 그동안 여성계가 이뤄 낸 성과는 많다. 그러나 남성은 물론 여성의 공감대도 제대로 얻지 못하는 ‘그들만의 여성운동’은 평등과 공존을 지향한다는 여성운동의 근본 목표와 어긋난다.

최근 논란이 됐던 5만원권 화폐 인물 선정에서도 여성계는 ‘누가 더 진취적인 인물인지 줄 세우기보다 다양한 인물을 발굴해 선택의 폭을 넓히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성운동의 선진국으로 꼽히는 미국에서도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은 20%도 안 된다는 여론조사가 있다. 우리나라 여성운동가들은 국내 여성운동에 대한 지지도가 이보다 높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