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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정호승]가슴속에 모신 스승 있나요

입력 | 2007-05-14 03:00:00


얼마 전 고3 학생의 어머니 한 분이 이야기했다. 학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온 딸아이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엉엉 울었다. “성적 좀 안 오른다고 그렇게 울면 어떡하니” 하고 달랬더니 그게 아니었다. 딸은 그날 아침 교문에서 학교 로고가 새겨진 흰 양말을 신지 않았다고 학생부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았다. 양말이 마르지 않아서 작년에 신던 학교 양말을 신고 왔다고 했다가 변명하지 말라고 더 야단을 맞았다.

칭찬 한마디에 인생 달라져

학교는 작년까지 ‘하얀 커버양말’을 신게 했으나 올해부터는 학교 로고가 새겨진 흰 양말을 신도록 규정을 바꿨다. 밤늦게 빨아 놓은 양말이 마르지 않아 작년 양말을 신게 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 딸에게 무척 미안했다고 한다. 학생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규제하는 ‘빨간 양말’ 등을 신긴 것도 아닌데 고3 학생을 아침부터 그렇게 야단쳐야만 했을까 싶어 무척 속이 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딸의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의 하소연을 다 들어주고 하나하나 토닥여 주었다고 한다. 다음 날에는 반 전체 학생에게 학교 로고가 새겨진 양말을 두 켤레씩 직접 사서 가방 속에 넣어 줬다. 딸아이는 양말을 아직까지 책상 위에 놓아두고 담임선생님께 감사해한다.

학교에서 신는 양말 하나 갖고도 학생들의, 그것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느라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자는 학생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게 우리 교육의 현장이다. 앞으로 학생의 인생 속에는 어느 교사가 스승의 이름으로 남을까. 당연히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한 담임선생님이 마음속에 남고 세상을 살아갈수록 인생의 큰 스승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듯이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나는 중2 때 김진태 국어 선생님을 만나 인생이 달라졌다. 내가 시인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게 된 것은 숙제로 써 간 시를 선생님께서 크게 칭찬해 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너는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구나”라고 하시면서 내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시를 처음 쓰는 중학생이 잘 쓰면 얼마나 잘 썼겠는가. 그러나 선생님은 ‘열심히 노력한다면’이라는 전제를 달고 나를 마음껏 칭찬해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 그 말씀을 잊은 적이 없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선생님은 늘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다. 선생님이 스승으로 존재하고 계심으로써 내 인생이 쓸쓸하지 않음을 나는 안다. 스승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음을 의미하므로 그런 면에서 나는 행복하다.

선생님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

가슴속에 스승 한 분 소중히 간직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선생님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말이 들린다. 더욱더 물질화된 사회가 돼서 인간으로서의 진실함과 순수함을 점차 상실하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점수 획득만이 삶의 목적이 되는 세태에서 학생은 공교육의 교사를 존경하지 못하고 교사는 사교육에만 열심인 학생을 사랑하지 못한다. 교육 현장이 배움의 장이라기보다는 투쟁의 장으로 변질된 부분도 있다. ‘전교조’라는 이름으로 교사 간에도 대립의 날이 너무 날카롭다.

시대는 변했다. 그러나 교육의 본질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사제 간에 교육적 사랑의 참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의 제자들은 기일만 되면 선생님 묘소를 찾는다. 스승과 제자 간에 형성된 사랑의 본질이 영원성을 지니기 때문이 아닐까. 스승의 날을 맞아 우리가 진정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지 자성해 볼 일이다. ‘선생님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말이 계속 들리는 사회는 불행하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