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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어제 하루

입력 | 2005-08-16 03:03:00


광복·국가·민족을 생각하며 특별히 한 일은 없었던 ‘보통 남한 사람’에게 어제 하루는 어떤 날이었을까.

휴일 다 챙길 수 있는 직장인에겐 ‘사흘 연휴가 아쉽게 끝난’ 날. 휴가지 상인에겐 ‘여름 끝물에 반짝 대목 만난’ 날. 그러나 도시 상인에겐 불경기, 주5일 근무에 광복절까지 끼어 ‘공친’ 날. 서울 택시 운전사에겐 행사 때문에 ‘교통 통제까지 야속한’ 날.

농민에겐 광복절이고 연휴고 없이 ‘논밭에 약(藥) 친’ 날. 수출 잘되는 회사 근로자에겐 ‘납기 때문에 잔업까지 한’ 날. 그래도 든든한 일터 있겠다, 수당 짭짤하겠다, 귀가하는 발길은 가벼웠다.

취직 다수생(多修生)에겐 ‘입사원서 한 장 더 쓴’ 날. 일자리 많이 만들겠다던 높은 사람들은 ‘경축식에 다녀온’ 날이라 광복·국가·민족을 많이 생각했을런가.

대입 수험생들에겐 수능 D―100일로 ‘스트레스 받은’ 날. 그 부모들에겐 ‘자식 눈치 본’ 날. 그래도 평등교육 믿다가 애 앞길 막을 수야 없지!

‘보통 북한 사람’에겐 어떤 날이었을까. 짐작은 간다. 광복절이라고 갑자기 양식(糧食)이 생겼을 것 같지는 않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축전을 교환했다. 김 위원장은 ‘인민’을 강조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에 걸맞게 ‘새 생활을 창조하기 위한 인민의 투쟁’ ‘인민의 지향과 염원’ ‘인민의 번영과 복리’ 같은 말이 이어졌다.

그 인민의 평균수명은 세계적 추세와 반대로 짧아지고, 청년의 키는 노인보다 작다. 그런데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광복절 공동성명에서 오히려 남한 사람을 걱정했다. “남조선 인민은 미국의 군사적 강점 밑에서 참을 수 없는 노예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야말로 민족과 남조선 인민이 당하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이다.”

북은 남반부 민족의 ‘노예 신세’를 이처럼 딱하게 여기는데, 남에서는 16∼25세 청소년 813명에게 물었더니 ‘북에 가서 살고 싶다’는 답이 0%였다는 조사결과가 어제 나왔다.

이들 신세대는 입시전쟁에서 해방되지도 못하면서 이념적 평등교육의 피해를 두고두고 볼 처지다. 또 대학생이 된 뒤에는 취업전쟁에 피가 마를 지경이다. 공식 통계로는 청년실업률이 8%대지만 확실한 직장 없이 파트타임 일자리를 떠돌거나 ‘노느니 공부하는’ 경우를 포함하면 훨씬 높다. 그래도 북이 대안(代案)이 아니라는 것쯤은 꿰뚫고 있다. 하기야 ‘대한민국’을 흔들어 대는 골수 주사파(主思派)도 북에서 살겠다고는 않는다.

어제는 민족대축전이 절정이었지만, 북이 보통 남한 사람에게 안기는 최대 불안은 핵(核)이다. 이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이 “우리 민족끼리!”만 외치면 발 뻗고 잘 수 있나. 한총련 등 친북 운동권이 부르짖은 ‘미군 철수’가 북핵 폐기보다 더 급한가. 멀리 있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조차 나흘 전에 북핵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경제사회적 양극화의 위험성을 또 강조했다. 양극화는 분명히 숙제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 볼 ‘반면(反面)’도 있다. 빈곤층이 400만 명이라지만, 이들의 삶을 대다수 북한 주민과 견준다면 화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북에서 사람대접 받는 것은 극소수 ‘체제 수혜층’뿐이다. 경제 격차가 워낙 커져 이런 비교는 난센스 같지만, 체제의 차이가 수십 년 사이 국민(인민)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알 필요는 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정권의 독재와 인권침해 같은 ‘역사의 과오’를 샅샅이 들출 양이면 북쪽 인민이 겪고 있는 반(反)인권, 반자유 참상에도 눈길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가난을 극복한 과거 정권의 업적도 평가하면서 ‘선진 미래로 가기 위한 설계’를 내놓아야 한다. 광복 60년이라는 뜻 깊은 날의 경축사를 ‘지난날의 어두운 이야기’로 반토막내서는 국민이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

보통국민이 내년 광복절을 올해보다 편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국정(國政)의 번지수가 민생(民生)의 현주소와 동떨어져서는 정권도 행복해지기 어렵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