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금요칼럼/이재경]언론은 사실의 검증자다

입력 | 2004-12-16 17:53:00


“사실은 쉽게 획득되고, 재포장되고,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상품이 돼 버렸다.”

존 맥피라는 ‘뉴요커’ 잡지 기자의 말이다. 이 말은 빌 코바치 등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요소’라는 책에 인용돼 사실 검증이 얼마나 중요한 언론의 책무인가를 강조하는 데 사용됐다. 그만큼 편파적인 사실, 선택된 사실과 색칠된 사실들이 기사 속에 많이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미국 대통령 선거 직전에 CBS가 보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병역 의혹 기사는 날조된 문서를 확인하지 못한 부정확한 보도로 결론이 났다. 이 기사를 보도한 책임이 부담이 돼 댄 래더는 24년을 지켜 온 앵커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사실 판단을 잘못한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흑색선전의 선전자여서야▼

작년 봄 뉴욕타임스에서 제이슨 블레어 사건이 터졌다. 전국부 기자인 블레어가 적어도 37개의 기사에서 다른 신문의 내용을 훔쳐 오거나 만나지 않은 취재원의 말을 날조한 것이다. 이 사건은 블레어 기자의 파면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자들은 편집국 문화의 개혁을 요구했다. 편집인과 편집국장의 사임이 이어졌다. 이 신문은 지면을 통해 사건 전모를 독자에게 설명했다. 1면 톱기사 자리에 사과 기사를 실었으며 2개 면을 사용해 확인된 잘못들을 낱낱이 공개했다.

CBS 뉴스와 뉴욕타임스 사례를 소개하는 이유는 미국 언론이 잘못을 시정하는 자세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벌써 일주일 넘게 이철우 의원에 대한 보도와 정치공방이 계속돼 왔다. 발단은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 등의 국회 발언이다. 그들의 주장은 ‘미래한국’이라는 인터넷 신문의 보도에 토대를 두었다. 주 의원의 발언 직후 모든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그의 주장을 주요 뉴스로 전하기 시작했다. ‘미래한국’의 기사여서가 아니라 국회의원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같은 내용이지만 사실성의 무게가 달라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열린우리당과 이 의원은 한나라당의 공세에 대응해 또 그들이 선택한 부분적 사실들을 제시한다. 이 의원은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없고, 김일성과 인공기에 대한 충성 맹세는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요지다. 모든 언론사는 이번에는 이 의원 측 해명과 반론을 기사화하며 여당과 야당의 싸움을 중계해 나간다.

언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러한 상황을 접하는 마음은 착잡하다. 한편으로는 한국 민주주의가 헤어날 수 없는 덫에 걸려 주저앉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언론은 정치인의 필경사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파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벌이는 폭로극에 놀아나는 언론을 갖고는 선진적 민주정치를 일상화할 수 없다. 언론이 섬겨야 하는 대상은 정파나 정치인이 아니라 독자요 국민이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던지는 계산된 사실, 당파적 진실의 무책임한 중계나 증폭이 아니다. 언론은 흑색선전의 확산자가 아니라 사실의 검증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급한 정치보도 개혁▼

한국 정치커뮤니케이션의 고질적 문제를 이해하려면 멀리 갈 필요 없이 김대업과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기피 의혹 폭로사건을 기억하면 된다. 또 설훈 의원이 폭로한 최규선 게이트도 있다. 두 사건 모두 상당 기간 전국의 모든 언론사에 의해 주요 뉴스로 취급됐음을 모두가 기억한다. 문제는 검찰 수사와 법원의 판단은 두 사건 모두 조작된 사실로 귀결되는 상황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엄청난 파장을 가져온 오보의 향연이 지나간 뒤 공개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정치 보도의 개혁을 선언한 언론사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언론사는 정치인의 말을 인용했으니 형식적인 객관 보도의 원칙은 지켰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은 정치인의 정파적 언사를 증폭하는 언론을 원치 않는다. 국민은 언론이 독립적으로 정치적 주장이 진실인지를 판단해 주는 사실의 확정자 역할을 강화하기를 원한다. 언론이 거짓말하는 정치인을 추궁하고 추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개혁될 수 없다.

이재경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jklee@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