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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입력 | 2004-12-03 17:34:00

그림 박순철


위왕(魏王) 표(豹)나 그를 따르던 장졸들은 원래 소성(蕭城) 안으로 돌아가 성문을 닫아걸고 버텨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패왕과 초나라 군사들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워낙 바짝 따라붙어 위왕의 군사들이 소성 안으로 쫓겨 들어간다 해도 성문을 닫아걸 새가 없었다.

“할 수 없다. 소성을 버리고 하읍(下邑)으로 가자! 거기 가면 우리 대군이 있다.”

위왕 표가 그렇게 소리치며 먼저 말머리를 북으로 돌리고, 어렵게 몸을 빼낸 장졸들도 정신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런 위병(魏兵)을 초나라 군사들이 쉽게 놓아주지를 않았다. 한참이나 따라가며 짚단 베어 넘기듯 하다가 패왕의 외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뒤쫓기를 멈추었다.

“달아나는 토끼를 더는 뒤쫓지 마라. 이제는 팽성의 큰 사슴을 잡을 때다!”

패왕은 그렇게 외친 뒤에 한층 목소리를 높여 덧붙였다.

“장졸들은 모두 비어있는 소성으로 들어가라. 거기서 요기를 하고 잠시 숨을 돌린다. 팽성은 오늘 안으로만 가면 된다.”

그러자 장수들이 의아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대왕께서는 적을 위장하거나 달아나는 적의 꼬리에 붙어 단숨에 팽성까지 우려 빼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소성에서 늑장을 부리면 여기서 우리가 간다는 소문이 먼저 팽성에 들어가 적이 방비를 굳게 할까 걱정입니다.”

그래도 패왕은 태평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번에는 소문으로 먼저 팽성을 치고, 그 다음에 군사로 밀고들 작정이다. 진작부터 떠돌던 과인이 돌아오고 있다는 풍문에다, 어제 오늘 호릉(胡陵)과 유현(留縣)에서 잇따라 들어간 소문으로 팽성 안은 지금 악머구리 들끓듯 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 새벽 여기서 있었던 일이 전해지면 성안은 더욱 겁먹고 혼란되어 싸울 마음을 잃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소문으로 먼저 적을 친다는 뜻이다.”

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장졸들을 소성 안으로 몰고 들어갔다. 하지만 성안에서 서둘러 요기를 마치기 무섭게 패왕은 또 다른 명으로 장수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제부터 성 안팎에서 의병(疑兵)을 모은다. 성안 백성들 중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를 뺀 모든 남자들과 미처 달아나지 못해 사로잡힌 성 밖의 모든 적병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 대오를 짓게 하라. 그들에게 기치와 창검을 들려 우리를 뒤따르게 하면 우리 군세가 배로 늘어난 것처럼 꾸며 팽성의 적을 한층 더 놀라고 겁먹게 할 수가 있다.”

그런 패왕은 이제 기세와 용력만으로 내닫던 강동의 호랑이도 아니고, 집중과 속도만으로 전기(戰機)를 돌려놓던 거록(鉅鹿)의 맹장도 아니었다. 본능처럼 타고난 승패의 기미를 포착하는 능력에다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부리고 쓸 줄 아는 병가(兵家)의 심지(心地)까지 갖춘 싸움의 화신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패왕의 명을 받은 초나라 군사들이 소성의 군민(軍民)과 사로잡은 제후군을 긁어모아 의병을 얽어 보니 그 수가 무려 5만이나 되었다. 진시(辰時)에 들 무렵 패왕은 그들에게 시늉만 낸 창칼과 깃발을 주어 뒤따르게 하고, 자신은 3만 정병을 몰아 마침내 미루고 미뤄 온 팽성으로 달려갔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