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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입력 | 2004-11-24 18:19:00

그림 박순철


“이기고 지는 것은 싸우는 자에게 늘 있는 일이오. 장군에게 참으로 죄가 있다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난 죄일 것이나, 이는 먼저 팽성부터 찾아놓고 난 뒤에 묻겠소.”

패왕이 알아보게 풀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항양에게 물었다.

“듣기로 노현(魯縣)에는 번쾌가 이끄는 대군이 있다 하였는데, 어떻게 이리 탈 없이 올 수 있었소?”

“신도 그 소문을 듣고 걱정했습니다만 무엇 때문인지 한군은 며칠 전 호릉(胡陵)으로 물러갔다 합니다. 풍(豊) 패(沛) 쪽을 굳게 지키기 위함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패왕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양이 여전히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패왕은 새로운 사냥감을 본 맹수처럼 두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장군은 이제껏 해 온 대로 이 사람들과 수레를 보호해 호릉으로 오시오. 다만 한 가지―우리와 함께 달려가지는 못한다 해도 너무 늦어서는 아니 되오. 내일 아침 밥 지을 때는 호릉에 이르러 우리와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그리고는 뒤따라오던 장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오늘밤 우리는 호릉에 있는 적을 친다. 여기서 호릉까지는 100리 길, 적을 야습하기 위해서는 바삐 달려가야 한다. 창칼과 주먹밥 하나만 지니고 짐은 모두 버려라. 그것들은 오늘밤 호릉에서 적에게 다시 얻으면 된다.”

패왕은 우미인에게 끝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 패왕의 뒤를 가리고 가려 뽑은 3만 장졸이 한줄기 빠른 바람처럼 뒤따랐다.

초경 무렵 호릉 동북쪽 30리쯤 되는 골짜기에 이른 패왕은 다시 장수들을 불러 가만히 영을 내렸다.

“여기서 군사들에게 주먹밥을 먹이고 푹 쉬게 하라. 불을 피워서도 안 되고 소리를 질러서도 아니 된다. 그러다가 삼경이 되면 군사들은 깨워 일시에 호릉으로 짓쳐들게 하라.”

그때 번쾌의 3만 군사는 호릉 성밖 벌판에서 느긋하게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지난 보름 싸움다운 싸움 없이 노현에서 설군, 하구까지 휩쓸고 다니는 동안 자라난 만심(慢心)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며칠 전에는 초나라 도읍인 팽성까지 한왕에게 떨어졌다는 소문이 오자 신중한 번쾌까지도 마음이 풀어지고 말았다. 패왕 항우가 제나라에서 팽성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지킨다면서도 척후조차 제대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삼경 무렵이었다. 진채 바깥쪽에서 파수를 서던 군사들이 번쾌의 군막으로 달려와 알렸다.

“동북쪽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립니다. 적지 않은 인마가 달려오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번쾌는 그게 바로 패왕이 이끄는 3만의 정병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기껏해야 겁 없는 척후대거나 한군의 세력을 떠보려는 적의 전군 선봉일 것이라 여기며, 곁에 두고 부리는 부장 하나를 불러 명했다.

“너는 10여기(騎)를 이끌고 달려가 오고 있는 군사들이 어느 편이며, 그 세력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그리고는 천천히 전포를 걸치며 다른 장수들도 깨우게 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