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 위반이나 지역주민의 원성을 의식해 지역구에 내려가지 않은 의원들이 많은 탓일까. 추석연휴 첫날인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앞에 주차돼 있는 의원 차량이 적지 않았다.-서영수기자
고향으로 향하는 국회의원들의 발걸음이 무겁다. 어려운 경제, 성난 민심, 얇아진 의원들의 주머니 사정, 엄격한 선거법…. 한가위 귀향활동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추석이나 설 명절은 의원들이 지역구에 내려가 의정활동을 홍보하고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 표밭을 다질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올 추석엔 ‘고향 가기가 무섭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열린우리당 서갑원(徐甲源·전남 순천) 의원은 25일 지역구로 내려가기 전 “이래저래 인사할 곳이 많은데 선거법에 덜컥 걸릴까봐 선물도 못하고 미칠 노릇”이라며 “노인정이나 보육시설을 찾아가 설거지나 빨래를 하면서 몸으로 때우다 올라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날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가 남대문시장 상인들에게서 봉변에 가까운 홀대를 받은 것도 의원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다.
김부겸(金富謙·경기 군포) 의원은 “엄청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얘기하고, 비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아예 납작 엎드릴 준비를 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의원들의 호주머니가 예전에 비해 훨씬 얇아진 탓도 있지만, 엄격한 선거법도 귀향활동을 옥죄는 요인이다. 선물이나 식사대접을 함부로 했다가 선거법에 걸릴까봐 아예 사람 만나기를 꺼리는 의원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 고흥길(高興吉·경기 성남 분당갑) 의원은 “명색이 한가위인데 빈손으로 인사하면 누가 반겨 주겠느냐”며 “돈도 없고 법도 무서워서 당직자나 당원들에게도 선물 하나 돌리지 않고, 아무런 일정도 잡지 않았다”며 ‘방콕’(방에 콕 처박혀 지내는 것)을 선언했다.
장윤석(張倫碩·경북 영주) 의원은 “노인정 등에 과일이라도 한 상자 보내고 싶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찾아갈 낯이 없다”며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 혼자 나가서 손 인사나 나눌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28일 서둘러 상경할 계획이다.
열린우리당 장영달(張永達·전북 전주 완산갑) 의원은 “주머니 사정도 팍팍하고 법도 무서워 당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인사하는 정도로 추석을 때우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우려와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한 중진 의원은 “‘좀 크더니 사람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이라며 “신세를 진 분들에게는 어떤 방법으로든 선물을 해야지, 법 때문에 미풍양속을 없앨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나라당 김덕룡(金德龍) 원내대표는 24일 오전 원내대책회의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는데 내 정치 인생에서 올해처럼 썰렁한 추석은 없었다”며 “조그마한 선물로 마음을 표시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해 정말 송구스럽다”며 굳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이부영(李富榮) 의장도 최근 농수산물시장을 찾아 “추석에 농수산물을 많이 사야 형편이 좋아지는데, 선거법의 이 대목만이라도 고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편 원희룡(元喜龍) 의원 등 일부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보낸 추석 선물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돌려보내는 등 정치권의 날카로운 대립이 한가위까지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