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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보자]고구려사 쟁점들…(7)지배 이데올로기

입력 | 2004-05-17 19:10:00

고구려의 제천행사인 ‘동맹’ 또는 ‘동명’이 거행됐다고 알려진 중국 지린성 지안현 동쪽 산중턱 인근의 ‘통천동’ 또는 ‘국동대혈’의 입구.-사진제공 최광식 교수


《한국 고대국가와 고대사회의 지배이념으로 흔히 불교를 거론해 왔다. 그러나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야 전래 수용됐으므로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고구려의 400년간의 지배이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도외시해 온 셈이다. 종래 고대국가의 지배이념으로서 불교를 거론한 것은 사실 일본의 고대국가 지배이념으로서 불교를 상정한 데서 비롯됐다. 즉,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기준이었던 불교 공인과 율령 반포를 무비판적으로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 기준으로 대입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전의 토착신앙은 자연히 원시신앙이나 원시종교라는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대국가에 대한 기준과 관점이 다양화되면서 고대국가 형성 시기가 상향 조정됐고, 불교 수용이전의 토착신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지게 됐다. 문제는 우리의 고대 토착신앙에 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화와 제의에 관한 자료만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고대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신화와 제의를 통해 고구려의 지배이념을 유추해야 한다.》

고구려의 경우 건국신화와 제천(祭天)대회를 통해 천신(天神) 신앙이 고구려의 지배이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제천대회의 이름은 동맹(東盟)이라고도 하고 동명(東明)이라고도 했다. 제천대회의 제신은 분명 천신일 텐데 그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 명칭은 시조의 이름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천신에 대한 제사와 시조에 대한 제사가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명은 천제의 아들, 즉 천손이므로 천신을 제사하는 데 함께 배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제천대회는 ‘공회(公會)’로 기록되어 있다. 국가의 공식적 의례로 단순한 민속행사가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공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몸치장을 해 대단히 화려하게 의례를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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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의례는 다분히 지배이념을 실천적으로 나타내는 공공적 의례였다고 할 수 있다. 국왕이 제의를 주관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제천의례를 마치고 재판과 형벌을 집행한 데서도 제의의 규범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북한이 고조선의 시조 단군의 능이라고 주장하는 단군릉(평양 강동군 문흥리)에 모셔진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초상. 고구려 제천대회는 이 시조의 시호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사진제공 최광식 교수

이같이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에는 천신신앙이 지배이념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신화가 신앙의 이론적 구조라고 한다면 제의는 신앙의 실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소수림왕 2년(372) 불교가 수용되면서 고구려 왕실은 불교를 지배이념으로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초문사와 이불란사 등 사찰을 짓고 승려를 육성했다. 또한 북방불교의 특징인 ‘왕이 곧 부처다(王卽佛)’라는 사상을 강조하면서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왕즉불’ 사상을 활용해 왕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토착신앙인 천신보다 보편적인 불교를 통해 보다 수직적 권위를 과시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를 왕권 강화의 기제로 활용했다고 해서 천신 신앙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수용되고 나서도 제천대회나 시조묘 제사는 계속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만 국가의 중요한 의례로서 불교 의례가 더욱 중요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수림왕 2년(372)에는 유학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웠으며 소수림왕 3년에는 율령을 반포해 유학적 정치이념을 도입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유학도 지배이념으로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불교가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는 데 활용되었다면 유학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이념으로서 이용되었다. 특히 군신(君臣)간의 충성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즉 불교와 유학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 지배이념으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한편 영류왕 7년(624)에 처음 전래된 도교는 보장왕때 적극 수용됐다. 특히 연개소문이 보장왕 2년(643) 왕에게 고하기를 “삼교(유불도·儒佛道)는 솥의 발과 같아, 그 하나라도 없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성하나 도교는 그렇지 못하니 천하의 도술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신을 당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국인(國人)을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지배계층은 도교를 지배이념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결국 고구려 말기에는 유교 불교 도교 등 삼교를 모두 중요시해 이를 지배이념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외래 신앙이 전래 수용되기 전 고구려에서는 천신 신앙으로 대표되는 토착신앙이 400여 년간 지배이념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 수용되어 왕권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유학이 정치이념으로 활용되면서 외래 신앙이 200여년간 지배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말기에는 도교까지 전래 수용되어 유불도 삼교가 고구려의 지배이념으로서 활용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토착신앙은 외래 사상의 전래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봉되어 신화와 제의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최광식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벽화로 본 지배 이데올로기▼

고구려 제천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장천1호분 벽화.-동아일보 자료사진

고구려의 사상과 문화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고구려의 고분벽화다. 고분벽화는 서역(西域)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고 고구려의 독자적 산물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고구려의 독자적 요소와 서역 미술의 영향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라 생각한다. 초기 벽화는 인물화나 풍속화가 주로 그려졌지만 중기부터 사신도가 등장하고 후기에는 인물화나 풍속화는 아예 사라지고 사신도만 남게 됐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장천 1호분 벽화다. 여기에는 나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 사냥하는 모습, 춤추는 모습, 씨름하는 모습 등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는 어떤 행사의 과정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무를 향해 있는 모습은 신을 모셔 오는 것이며, 사냥은 제의에 필요한 희생물을 잡는 모습이다. 또 춤추는 것은 제의과정에서 가무(歌舞)를 하는 것이고, 씨름은 제의를 마친 후 뒤풀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토착신앙과 관련된 제의뿐만 아니라 불교적 요소(보살도와 승천도), 도교적 요소(사신도)가 혼합돼 나타난다. 이것은 고구려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토착신앙이나 불교 또는 유교 그 어느 하나가 아니라 시기와 기능에 따라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상과 종교의 특징인 유불선의 융화가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