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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15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입력 | 2004-02-25 18:46:00


프랑스는 ‘역사의 공기’가 희박해질 때마다, 그래서 질식할 지경이 되면 그를 찾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질 때면 역사 속에서 그를 뒤적였다. 그가 거두었던 수많은 승리는 ‘프랑스의 영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시대(時代)의 아들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나폴레옹도 없었다.’

그는 정복자이자 해방자였다. 그는 자신의 말발굽 아래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전파했다. 그 질곡의 ‘앙시앵 레짐’에 자유, 평등, 박애의 씨앗을 뿌렸다.

그 정치적 산물이 ‘나폴레옹 법전’이다.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 종교 선택의 자유, 재산권 보장, 농노제 폐지…. 그는 혁명의 구호를 현실에서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야심가였다. 프랑스혁명의 다시없는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혁명의 열매를 ‘훔친’ 독재자였다. “그는 왕좌가 아니면 단두대 외에는 머물 생각이 없었다.”(앙드레 모루아)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유산은 보나파르티즘이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귀결된다. 그는 역사의 격동기에 사상적 차이와 종교적 갈등을 공화국의 단일성이라는 최고의 가치 속에 묻었다.

“나는 프랑스 인민이라는 가장 큰 당파에 속한다. 나는 ‘붉은 모자’를 쓴 혁명가도 아니고, ‘붉은 구두’를 신은 귀족도 아니다.”

그의 전기를 집필한 막스 갈로는 나폴레옹이 근대인의 정치적 갈망의 심장에 자리 잡은 그 무엇이었다고 말한다. “풍문과 우연만으로 영웅은 탄생하지 않는다.”

‘왕관을 쓴 혁명.’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1804년 그가 황제에 즉위하자 베토벤은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비난했다. 역사는 그가 무모한 러시아 원정으로 45만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독재자로 지목한다. “나폴레옹이 자유에 반대한 ‘카이사르’임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1815년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그해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뒤 절해고도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된다.

이 ‘코르시카의 늑대’는 숨질 때까지 처절한 고독 속에서 시간이라는 괴물과 싸우며 우울한 내면 속으로 풍화되어 갔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내 인생은 얼마나 멋진 소설 같았던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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