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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칼럼]기업 때리기 自害증후군

입력 | 2004-01-05 18:18:00


상상해 본다. 노조 힘이 센 기업, 분규 중인 회사, 일자리 줄이는 설비투자만 하는 기업, 해외투자밖에 안 하는 회사, 불법 선거자금 댄 기업, 한국을 떠나려는 외국계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갈아 치운다. 새 CEO에는 경제부총리, 공정거래위원장, 노동부 장관, 청와대 정책실장과 정책수석,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위원장, 참여연대 대표를 영입한다. 대통령비서실장, 검찰총장도 모신다.

이들은 ‘드림팀 경영자협회’를 만들고 2004년 송년회에 나타난다. 거기서 이런 말이 나올까. 기업 못 해 먹겠다는 소리는 다 엄살이었어, 역시 기업은 더 규제해야 돼, 노조 달래기는 식은 죽 먹기였어, 노조가 경영에 참여하니까 회사가 더 잘되더군, 임금 달라는 대로 주고도 일자리 많이 만들었지, 내가 기업을 하니까 국민이 모두 사랑해 주잖아, 참여정부 로드맵대로 하니까 저절로 굴러가던 걸, 몇 달 동안 기업 먼지만 떨고 있어도 우리 경제 6% 성장했잖아….

▼하나가 급한 일자리 누가 만드나 ▼

꿈 깨자. 삼성 LG 현대자동차 SK까지는 갈 것도 없다. 저 드림팀 CEO들이 1000명, 아니 100명에게 꼬박꼬박 월급 줄 수 있는 정도의 경영만 해내도 박수치겠다. 나는 10명을 먹여 살릴 자신도 없다.

나라를 움직여 오늘에 이른 노무현 대통령도 장수천이라는 생수회사 경영에서는 영 딴판이었나 보다. 취임 반년 되던 날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돈 좀 벌려고 사업을 했다가 아주 혼쭐이 났다. 기업규제, 기업자금 이런 데 대한 애로도 경험할 만큼 다 경험했다. 자그마한 것 잠시 하면서도 온갖 종류의 기업인들의 고통 두루두루 다 겪어 봤다. 낱낱이 얘기하자면 길다.”

노 대통령은 본인 말대로라면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체험을 한 셈이다. 그래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 투자하고 싶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취임사를 비롯해 수없이 강조할 만도 하다. 문제는 그런 나라로 확실하게 바꾸는 행동을 보기 어렵고, 국내외 기업들이 믿지 않는 데 있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이 지난 세밑에 이렇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기업은 돈 된다면 사채 끌어서라도 투자한다. 밖에 돈 벌 데가 많은데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의무)를 지킨다고 국내에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인이 있다면 최고의 위선자다.”

박 회장의 발언은 듣기에 씁쓸하지만 현실을 일깨워 준다. 외국에 투자하면 더 환영받고 더 나은 조건의 더 많은 지원 아래 골치 덜 썩이고 이익을 낼 수 있는데, 국내에 더 투자하라고 아무리 조른들 기업인들의 마음이 움직일까. 외국에서는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여왕과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 공무원들이 온갖 수발 다 들어주고 세금 깎아주고 땅도 빌려주는데, 국내에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면 눈길이 어디에 머물까.

기업은 사적 이익을 좇는 존재다. 그 과정과 결과로 일자리가 생기고 소득배분이 일어나며 납세능력이 커진다. 기업의 기본적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것이 잘 되면 곧 국익이다.

▼경제 죽이는 反기업 정서 일등국 ▼

그래서 외국에선, 그것도 선진국일수록 기업이 상전이다. 그런데 국민소득 1만달러 고개에서 10년을 헉헉대는 이 나라에선 정부도, 노조도, 시민단체도 기업의 상전노릇을 하려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 반(反)기업 정서는 세계 일등국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부문이 더 깨끗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형편임에도, 어쩌면 그래서 더욱 열심히 기업 때리기로 딴 문제를 덮으려 한다. 결국 기업의 피해의식이 깊어지고, 기업가의 모험정신이 꺾였다. 그 부메랑이 국내투자 부진, 일자리와 소득 감소, 성장 장애, 국가경쟁력 약화 등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새해 경제운용의 초점을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두겠다고 발표했다. “진도(進度) 좀 나갑시다”고 정말 외치고 싶다. 언제까지 교과서 표지만 쓰다듬고 있을 텐가. 행동하라. 그리고 정부, 정치권, 노조와 국민 각계는 언제까지 맹목적 반기업 정서를 주고받으며 악성 규제와 경영권 침해와 기업 기죽이기를 계속할 셈인가. 기업을 밟아 경제가 산다면 계속 밟자.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