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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세러피]'러브 액츄얼리'…사랑하고픈 남자에 다가서기

입력 | 2003-12-18 17:14:00


“휴 그랜트를 좋아하세요?”

이렇게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적어도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를 좋아한다고 했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별로 관심 없지만 싫지 않다”고 했다. 다시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뭐죠?”라고 물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귀엽고 만만하고 때로 어수룩해 보이지만 밉지 않은 매력이 있다”는 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상영중인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그는 비서와 사랑에 빠지는 미혼의 영국 수상을 연기한다. 하지만 영국 수상이 되어 미국 대통령(빌리 밥 손튼)과 과감히 ‘맞짱’을 떠도 그의 만만함은 줄어들지 않는다. 되레 그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넓은 수상관저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은, 조금 외롭지만 결코 청승맞지는 않은 특유의 이미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면, “만만하고 귀엽다”는 건 대체 뭘까. 물론 그건 “잘생겼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인간관계에서의 주도권에 관한 이슈이다.

휴 그랜트는 예로부터 영화 속의 많은 남성들이 쥐고 있던 선택의 주도권을 여자에게 위임했다. ‘노팅힐’에서 그는 얌전히 서점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여배우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선택 ‘받는’다. 이는 관계에서 자율성을 얻고 싶은 여성들의 소망을 충족시킨다. 게다가 그는 여성들에게,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그의 엄마나 누나가 된 듯한 심정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휴 그랜트의 이미지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인물은 학교 스타를 흠모하는 꼬마 샘(토마스 생스터)이다 (그 아역배우가 실제 휴 그랜트의 사촌동생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눈으로, 연상의 연인이 쳐다봐 주기를 바라는 꼬마 드러머의 눈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눈꼬리가 약간 쳐진 눈으로 바라볼 때는 그 효과가 세 배 정도 커진다. 그러니까 휴 그랜트가 영화 속에서 제아무리 신나게 바람을 피워대도, 그를 바라보는 여성들은 분노와 질투 대신 보듬고 보호해 주고 싶은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휴 그랜트의 이미지는 상당히 관계 지향적이다. 누구를 연기하든, 그는 영화 속 상대역 뿐 아니라 스크린 바깥의 대상을 응시하며 어떤 종류의 관계에 대한 소망을 내비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럼으로써 나의 판타지와 그의 이미지 사이에 쉽게 ‘누나와 남동생’ ‘엄마와 아들’의 관계 혹은 일종의 동맹을 맺고 싶은 마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에서 휴 그랜트는 지나치게 친밀한 인간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주인공 윌을 연기한다. 이 영화는 “모든 인간은 섬이다. 섬들은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그렇게 사람 사이의 거리두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관계 맺기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휴 그랜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어바웃 어 보이’의 “인색하고 고독한” 윌이 실제 자신과 가장 비슷하며 완전히 공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이면에는,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손상되지 않은, 보다 온전한 만족을 얻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는 “나는 늘 소심한 배우라서 캐릭터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소심하게 표현하게 된다”고 한다. 결국 그의 진심은 그 말에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 휴 그랜트는 영화 속 이미지와 달리 매우 꼼꼼하고 연기에 대한 기준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취약함과 강함을 잘 알고 다루는 능력을 갖춘 배우인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는 이에게도 잘 전달할 수 있고 그 마음이 스크린에 스며들 때, 관객은 기꺼이 그 마음을 받아들여 그와 어떤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

알고 보면 ‘러브 액츄얼리’가 이끌어가는 지점도 바로 거기가 아닐까. 인간은 서로 연결되기 원하는 섬이고 그것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사랑’은 어디에나 있지만, 우선 내 마음 안의 외로움과 취약함을 마주하고 난 후에 누구에겐가 그 마음을 전달할 것. 물론 영화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병원 hjyoomd@unitel.co.kr

▼곁들여 볼 비디오/DVD▼

○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국내에 휴 그랜트의 ‘살인미소’를 처음으로 알린 영화. 이전에 ‘비터 문’등에서도 얼굴을 비친 적이 있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왕자로서 그의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시작됐다. 여자 친구가 많아도 사랑을 해본 적은 없는 찰스(휴 그랜트)가 거듭된 우연을 겪어가며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렸다. ‘러브 액츄얼리’의 리차드 커티스가 각본을 썼다.

○ 노팅 힐

역시 리차드 커티스가 각본을 쓴 영화. 평범한 책방 주인과 빅 스타의 동화 같은 사랑이야기. 런던 노팅 힐에서 여행서적 전문점을 운영하는 윌리엄 (휴 그랜트)에게 미래에 대한 꿈이나 희망 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세계적인 스타 안나 (줄리아 로버츠)가 우연히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이후 윌리엄의 인생은 달라진다.

○ 어바웃 어 보이

영원한 소년 같은 휴 그랜트가 이 영화에서는 아이와 싸우다가 어른이 되어간다. 부유한 백수인 윌(휴 그랜트)은 결혼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상대로는 ‘싱글 맘’이 제격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윌은 ‘싱글 맘’을 낚던 와중에 12살짜리 왕따 소년 마커스를 만나고, 그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한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