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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임경순/길 찾기 어려운 '과학기술 로드맵'

입력 | 2003-07-25 18:46:00


참여정부 들어 유행한 단어 중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올려진 것은 ‘코드’라는 말이다. 이와 함께 요즘 자주 회자되는 유행어가 ‘로드맵(Road Map)’, 즉 이정표 내지 지도라는 말이다. 한국과학기술평가원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중심이 돼 만든 ‘국가 과학기술 지도(NTRM:National Technology Road Map)’는 말할 것도 없고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에서 최근 ‘지방분권 로드맵’을 제안했다. 최근 과학기술부는 ‘국가 원자력기술 지도’까지 만들겠다고 한다. 정부 정책의 중장기 비전을 실천적으로 제안하기 위해 가시적인 각종 지도를 만드는 것은 이제 참여정부의 중요한 업무 방식이 됐다.

참여정부에 로드맵을 유행하게 만든 진원지는 과학기술 분야다. 정부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국가 과학기술 지도’라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미래 청사진을 마련하기 위해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하며 미래의 핵심 과학기술을 다각도로 물색해 왔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부터 과학기술 중심사회의 구현을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이를 실천할 구체적 계획을 마련하던 참여정부는 ‘국가 과학기술 지도’ 사업을 계승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정부는 5년 내지 10년 뒤 우리 사회를 먹여 살릴 핵심기술을 조기에 찾아내 집중적으로 육성함으로써 다가올 미래에 능동적으로 대비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워놓았다.

‘국가 과학기술 지도’ 작성 사업은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행정관료들이 망라된, 그야말로 엄청난 국가사업이다. 하지만 이 지도를 작성하는 데 과학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모두 고려하다 보니 로드맵이 너무 복잡해져 오히려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우려가 들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한국과학기술평가원에서 제시한 ‘국가 과학기술 지도’에는 무려 99개의 핵심 기술이 망라돼 있어,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조차도 국가의 미래 과학기술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핵심 기술들을 더 적은 수로 압축하는 일도 그리 간단치는 않다. 정책 조정 과정에서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는 제각기 우선순위가 다른 핵심기술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조율해 일목요연한 국가 과학기술 청사진을 마련하는 일은 무척 힘든 작업에 속한다.

애초에 ‘국가 과학기술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점은 설정한 기본방향이 실제 지도를 만들어낼 때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국가 과학기술 지도’를 만든 기획단은 한국을 둘러싼 산업 기술의 환경 변화를 진단하면서 미래의 산업은 융합화·분화·네트워크화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에 기술 분야간 융합으로 다양한 신기술, 신산업이 탄생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분야별 세부 과학기술 지도를 만들 때는 이런 융합 분화 정신이 철저하게 반영되지 못했고, 여전히 우리 과학기술계의 고질적인 문제점들로 지적되고 있는 ‘분야 내 이기주의’가 그대로 노정되는 한계를 드러냈다. 즉, 각 분야 전문가들이 미래의 핵심기술 후보에 자신이 속한 분야의 기술이 가급적 많이 들어가도록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만, 정작 기대했던 융합된 미래 기술의 모습은 잘 나타나지 않았다.

요즘 과학기술은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형태로 발전할뿐더러 핵심적 실험방법과 장치의 출현이 중장기적 차원에서 미래 과학기술을 이끄는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최근 주목받고 있는 나노테크놀로지가 나타나기까지에는 개개의 원자 혹은 분자를 직접 관찰하며 조작할 때 필수적 장치인 주사투과현미경(STM:Scanning Tunneling Microscope)과 원자현미경(AFM:Atomic Force Microscope) 등의 출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가 과학기술 지도’를 작성할 때도 수많은 핵심기술을 창출할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에 대한 분석과 아울러 이론적 실험적 사회적 차원에서 미래 과학기술의 모습을 결정지을 중장기적 제한요소가 무엇인지, 보다 깊이 있는 진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