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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非常]벤처 희망은 없나

입력 | 2003-05-22 18:58:00


《21일 한국 벤처산업의 심장부 테헤란밸리(서울벤처밸리)에서 만난 3R소프트 유병선 사장은 “10년 넘게 벤처업계에서 일했지만 요즘 같은 불황은 처음 겪는다”고 말했다. 인터넷솔루션업체인 3R소프트는 올 초 선보인 스팸메일 차단도구의 반응이 좋아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인데도 1년반 전 70명에 이르던 직원 수를 절반으로 줄였다. 임대료를 아끼기 위해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사무실 공간도 250평에서 160평으로 줄여 쓰고 있다.

유 사장은 “올해 안에 벤처기업의 절반은 망한다는 대란(大亂)설이 파다해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던 벤처업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

자금난에 경기침체가 겹치면서 문을 닫는 벤처기업들이 늘고 있다. 투자시장은 얼어붙고 창업도 위축돼 ‘벤처 생태계’는 사실상 와해된 상태.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4월 말 현재 벤처기업으로 지정된 회사는 8474개로 작년 말에 비해 304개 줄었다. 2001년 말 1만1392개에 비교하면 2918개나 감소한 것으로 올 들어서는 한 달에 74개꼴로 벤처기업이 줄고 있다.》

▼연재물 목록▼

- 고비 맞은 중소기업
- 위기의 수출산업

▽무너지는 벤처, 가중되는 자금난=테헤란밸리 인근의 게임 전문 벤처기업 A사. 지난해 초만 해도 코스닥 등록을 앞둔 유망한 기업이었지만 10개월째 일손을 놓고 있다. 지난해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 전원이 부실경영을 책임지고 물러난 뒤 업무가 마비된 것. 400명에 이르던 직원도 뿔뿔이 흩어졌다. 2년 전 400억원대에 이르던 보유 현금이 바닥난 것은 물론 자본도 잠식됐다. 하지만 뾰족한 수익원을 찾지 못해 새 경영진은 한숨만 쉬고 있다.

박사와 연구원 등 고급인력이 많아 알짜 벤처기업이 많은 대덕밸리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지난해 말부터 연간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던 H사를 비롯해 신소재 개발업체인 S사, MP3 제조업체 O사 등 대표기업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강원 춘천시 테크노파크는 당초 애니메이션 벤처단지를 표방했으나 벤처 한파를 거치면서 생명과학단지로 변신을 모색 중. 인천에서는 인천인터넷기업협회 소속 33개사 가운데 3개사가 문을 닫은 데 이어 올 들어 3, 4개 업체가 부도 위기에 몰려 있다.

인터넷 솔루션업체인 C사는 최근 거래 은행에 대출금을 급히 갚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이 회사 사장 L씨는 “작년만 해도 돈을 빌려주겠다는 금융기관들이 많았는데 올해는 빌려준 돈을 무조건 회수해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백종태 대덕밸리 벤처연합회장은 “대덕밸리 벤처기업의 상당수가 금리를 최고 연 17%까지 높여내는 조건으로 대출기한을 연기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벤처 위기는 어디서=이처럼 부실 벤처가 늘어난 것은 이제까지의 벤처정책이 양적 성장 중심으로 흘렀기 때문. ‘제대로 된 이익모델을 갖춘 기업은 몇 개 안된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돈벼락에 벤처정신을 잃어버린 기업들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기보다는 주가를 띄워 뻥튀기하는 ‘머니 게임’에 심취하기도 했다.

정현준 진승현 사건에서 보듯 벤처정신이 없는 ‘무늬만 벤처’ ‘엉터리 벤처’들이 물을 흐려놓은 것도 벤처 전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중요한 이유. 기술자 출신의 벤처기업가가 경영엔 문외한이어서 부실이 쌓이기도 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이인찬 산업연구실장은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벤처기업이 많다는 점보다는 유망한 기업에 적절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밝혔다. 벤처기업의 성공 확률은 3%라고 하는데도 부실한 벤처기업들이 제때 퇴출되지 않아 벤처산업 전체에 불신이 누적됐다는 지적. 장흥순 벤처기업협회장은 “벤처 토양이 건전해지려면 부실한 기업이 원활히 퇴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벤처 컨설팅업체 AT그룹의 배재광 사장은 “창투사가 130개 정도 되지만 90% 정도는 부실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좋은 벤처와 나쁜 벤처를 가리는 심판 역할을 해야 할 창투사부터 ‘선구안’이 없었던 것이다.

▽해법을 찾아서=네트워크 장비업체 한터기술은 최근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옛 구로공단인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우림e비즈센터로 사무실을 옮겨 유지비용을 종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였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는 우림e비즈센터 외에도 에이스테크노타워 등 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아파트형 공장이 15개나 들어서 770개 벤처기업에 입주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 솔루션 전문업체 지란지교소프트의 오치영 사장은 작년 말부터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인원을 줄이는 감량 경영으로 2분기 연속 흑자를 내는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인찬 실장은 “앞으로 벤처정책은 시장에서 창업 및 퇴출, 인수합병(M&A) 등 구조조정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벤처산업을 살리려면 벤처 구조조정시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M&A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벤처기업은 코스닥 기업이 90개, 장외 기업이 2000개 정도이지만 거래가 성사되는 경우는 드물다.

벤처기업의 성공 사례가 온라인 게임과 콘텐츠 등 국내용 서비스 시장에만 집중되고 있는 것도 한국의 벤처산업이 극복해야 할 대목이다. 배재광 사장은 “한국 시장은 너무 작다”며 “일정 수준에 오른 벤처기업이 마이크로소프트(MS)나 휴렛팩커드(HP)처럼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도록 돕는 국가 차원의 성장 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태한기자 freewill@donga.com

대덕=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인천=황금천기자 kchwang@donga.com

▼게임업체 웹젠…온라인게임 '뮤'로 벤처신화 재점화▼

최근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주식을 공모한 인터넷 게임업체 웹젠(대표 김남주). 14, 15일 이틀간 진행한 공모주 청약에서 경쟁률 1434.5 대 1을 기록하며 3조3050억원이 몰린 이 회사에 대해 ‘꺼져 가는 벤처 신화에 다시 불을 붙인 업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고 있다.

2000년 5월 웹젠은 현재 마이클럽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긴 이수영 사장을 주축으로 현 대표이사인 김남주 사장 등 4명이 모여 창업했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3차원(3D) 입체 그래픽으로 만든 온라인게임 ‘뮤’는 2001년 5월 공개 시범서비스(오픈베타)가 시작되자마자 석 달 만에 사용자가 100만명으로 늘었다. 같은 해 11월 유료화 이후 두 달 만에 당시 자본금 12억7000만원보다 많은 매출액 24억원을 냈다. 작년에는 매출액 288억원에 순이익 152억원을 냈으며 올 1·4분기에는 매출액 130억원에 순이익은 77억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웹젠이 회사를 시작했을 때 벤처 열기는 싸늘히 식은 후였다. 잇따른 벤처 관련 부정 사건으로 시장이 얼룩진 뒤, 웹젠의 온라인 3D기술은 ‘벤처’라는 이유로 투자자들 사이에서 외면당했다. 결국 웹젠은 이수영 사장의 인맥을 중심으로 한 개인투자자들로부터 자본금 상당부분을 끌어 모았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인력을 충원하려고 해도 이 분야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은 전무했다.

작년 10월 중국에 진출, 2월부터 현지 서비스를 시작한 웹젠 관계자들은 첫 로열티 12억원이 입금되기 전까지 밤잠을 설쳤다. 중국 업체와 계약을 했다가 로열티를 제대로 못 받거나, 중국측이 계약을 위반해도 국내 벤처기업들은 법적 제도적 구제책이 없어 눈 뜨고 돈을 떼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웹젠 공모에 몰린 돈은 3조3050억원. 투자처를 찾지 못하다 불현듯 나타난 작은 불씨에 부나방처럼 모여든 돈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남주 사장은 “실적을 놓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일시에 몰린 자금이 주가에 거품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했다.나성엽기자 cpu@donga.com

▼産硏협력 없는 대덕밸리▼

한국 최대의 정보기술(IT)기업 집적단지인 대덕밸리협동화단지. 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 연구원들이 창업한 회사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분위기가 썰렁하다.

단지 한가운데 자리잡은 G사 건물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1999년 창업해 갖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작년 말 새 사옥으로 입주했지만 자금 압박을 이기지 못해 그 뒤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이 회사는 대덕밸리 내 기술중심형 벤처기업의 대표주자였다. 창업 3년 만에 따낸 특허만 해도 국내는 128건, 국제는 8건이나 됐다. 상품화한 제품이 7종, 당장 상품화할 수 있는 아이템도 40건이 넘었다.

IT 분야에 이어 대덕밸리의 간판 업종인 바이오 분야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학캠퍼스 분위기의 대덕바이오커뮤니티(DBC)에는 코스닥 등록기업인 인바이오넷을 비롯해 바이오벤처 15개사가 입주해 있다. 기술력 면에서는 한결같이 아시아 최고로 인정받는 기업들. T사는 지난해 외국생명과학 전문가들로부터 ‘주목해야 할 아시아의 10개 생명과학회사’로 뽑혔지만 자금이 바닥나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다.

“활활 타올라도 시원찮을 대덕밸리가 침체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최근 대덕밸리를 찾은 정관계 인사들은 왜 성공한 기업은 없느냐고 자주 묻는다.

하지만 대덕밸리가 처한 상황은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대덕밸리의 최대 강점인 연구단지와 벤처기업들의 관계를 보면 상호 협력시스템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친분을 활용한 공동연구는 있지만 기관과 기업간의 협력관계는 거의 없다. 얼마 전 생명공학연구원에서 1연구소-1벤처 자매결연 ‘이벤트’를 연 것이 그나마 드문 사례다.

이처럼 기술력이란 공통분모가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공동시장 개척이나 구매 등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대덕밸리의 800여 벤처기업 가운데 코스닥 등록기업은 단 5개에 불과하다. 100억원대 매출 기업이 10여곳뿐이라는 성적표는 한국 최고의 기술벤처 집적지라는 명성에 비하면 초라하다.

대덕밸리 기업들은 이러다 모두 쓰러지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에 젖어 있다. 벤처기업만이 아니라 정부, 금융기관, 연구소 등 모두가 벤처기업 생존을 위한 방안을 고민해야 할 상황이다.

이석봉 대덕넷 대표 factfind@helloDD.com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경제부=신연수 임규진 홍찬선 김광현 김태한 황재성 박중현 홍석민 신치영 이헌진 이나연기자

▽사회1부=정용균 강정훈 조용휘 정승호 지명훈기자

▽사회2부=차준호 남경현 황금천기자